귓가에 아련히 울려 퍼지는 음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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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아련히 울려 퍼지는 음악과의 대화
  • 월간오디오
  • 승인 2009.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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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손예지 양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날카롭고도 강렬한 선율,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광포하게 밀려오는 현의 너울거림, 바닥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지상의 천둥…. 그리고 삼촌이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는 우스꽝스러운 뒷모습.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듣던 음악? 아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한다. 은은한 푸른색의 너울거림과 거대한 혼 모양의 조형물. 이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는 그렇게 소리가 나는 기계, 내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어른, 그리고 남자들의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삼촌은 내가 음악에 귀 기울일 때마다 늘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지야, 방안을 따뜻하게 감싸는 소리의 온도감을 느낄 수 있니? 저 처절하게 울부짖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느껴지니? 이것과 연결하면 또 다른 느낌일 거야. 재미있지?”

소리에도 온도감이란 게 있나. 소리의 변화란 게 뭐가 중요할까. 생각하며, 그냥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음량을 크게 들으면 다 좋게 들리겠지 하던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촌이 내가 듣던 MP3와 CD를 비교하며 들려주었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MP3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데, 이것이 삼촌이 그토록 이야기하던 재미였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 삼촌의 오디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삼촌이 가지고 있던 오디오 브랜드도 외우는 성과를 이루었다. 푸른 눈의 매킨토시, 혼의 JBL 스피커. 내가 외운 첫 번째 브랜드였다. 삼촌은 이런 내가 기특했는지, 졸업 선물을 사주신다며, 나를 용산으로 이끌었다.

카메라 매장들이 많이 있기에, 당연히 카메라를 사주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느 한 오디오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닌가. 삼촌이 또 오디오를 기웃거리나보다 생각하며 멍하게 있었는데, 대뜸 어떤 기기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그랬다. 삼촌이 나에게 오디오를 선물하고자 한 것이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아는 유일한 브랜드, 매킨토시, JBL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마침 저 뒤에 파란 눈으로 날 반기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해맑게 웃음 지으며, 감사의 인사와 표정 관리를 생각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곧 매장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을 직감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 가격이 그렇게나 나갔다니,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삼촌이 서둘러 분위기를 수습하면서, 작고 귀여운 시스템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우선 삼촌이 자기 집에 있던 스피커와 우중충한 색의 CD 플레이어를 가지고 와서 세팅을 해줬는데, 내 것이 아닌 것 마냥 멀리서 빤히 지켜보았다. 여러 케이블을 연결하고, 이것저것 조심하는 모습에 돌연 내가 저것을 왜 선물 받았을까. 막연한 불안감도 들었다. 그렇게 삼촌이 끙끙거리며 세팅을 끝나고 첫 번째 음반을 들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 첫 음을 듣는 순간부터, 삼촌 시스템과의 차이가 느껴진다. 방 안을 감싸는 소리가 좀 부족한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삼촌이 말하던 차이인가. 그래도 내 오디오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묘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어떤 음반을 들을까. 순서대로 리스트가 나온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모차르트 교향곡들…. 오늘 밤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가만히 생각해보니 삼촌이 선물해준 앰프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킨토시와 JBL을 외우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큰일이다. 더구나 영어를 보니 상당히 길다. ‘Unison Research’. 인터넷을 한참 검색하고 나서야, 유니슨 리서치라고 읽고, 이탈리아 산이고, 진공관 앰프로서는 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유니슨 리서치,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아이이다. 불 끄고 진공관만 바라보아도 기분 좋고, 방 안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더구나 목재와 진공관의 아기자기한 모양새가 참 좋다. 가끔은 음악은 듣지도 않고 진공관만 켜놓은 채 가만히 바라본다. 솔솔 진공관이 예열되는 시간, 그 온도감이 어느 자장가보다 행복하게 느껴진다.
가끔 삼촌이 내 방에 놀러와서 시스템 점검에 한창 열을 올릴 때가 있다. 케이블을 바꿔야 하는데, 진공관을 바꿔야 하는데,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혼자말처럼 내뱉는데, 너무 진지한 모습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를 때가 많다. 내 방에 오디오 시스템이 생긴 덕분에 삼촌 집에 놀러가는 횟수가 좀 줄어들었지만, 가끔 그 푸른 눈의 검은 왕자가 그립기도 하다. 요즘에는 그 푸른 눈보다 그 진득한 소리가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모델 일로 한창 바빠졌다. 고등학교 때 몇 가지 모델 일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몇 군데서 날 좋게 보았나 보다. 그것이 여기저기 연결되어 화장품 모델의 전속을 따는 행운도 생겼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붙는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삶, 조금씩 열리고 있는 기분이다. 행운은 동시에 찾아온다고 했는가. 삼촌의 오피스텔을 덜컥 맞게 되었다. 삼촌이 몇 년간 사업 때문에 오피스텔을 장기간 비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나의 오디오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던진 것이다. 오디오를 무엇보다 애지중지 하는 삼촌이 나에게 오디오를 맡기다니 믿기 힘든 노릇이다. 그래도 나를 위해 혹은 삼촌을 위해, 시스템을 어떻게 켜야 하는지 순서와 당부의 말을 빼곡하게 메모해놓은 것을 보니 심각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어찌되었든 나도 일과 학교 때문에 서울에 머물러야 할 상황이니, 내게는 좋은 기회이다.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만 해도 자축해야 할 일이니까.
오피스텔의 시스템을 처음 본 순간부터 현기증이 났다. 이렇게 거대한 스피커라니. 더구나 모양도 정말 특이하다. 여기서 과연 소리는 날까. 넘어지진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고, 첫 느낌은 그야말로 나의 불안감이 2배는 커진 것 같다. 더구나 2개의 거대한 컴퓨터 본체 모양의 저것은 또 뭐란 말인가. 오디오를 잘 아는 사촌 오빠를 급히 불러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본다.
<B>“이건 B&W고, 저건 마크 레빈슨, 모두 유명한 기기이네. 말 그대로 남자의 로망을 너가 떠안았구나.”
께름칙하지만 역시 사촌 오빠의 힘을 빌려 시스템의 첫 소리를 들어본다. 속으로는 매킨토시, JBL보다 소리가 더 좋겠어 하며 별 의욕 없이 카라얀의 행성을 틀었다. 음악이 나오는 1시간여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된 것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애틋한 심정, 첫 사랑을 잊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굽이치는 듯한 묘한 감흥이었다. 사촌 오빠가 이야기한 남자의 로망. 투박한 남자지만, 매력이 넘치는, 그런 남자가 아닐까. 갑자기 이 우락부락한 시스템에 잔뜩 마음을 빼앗긴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막연히 끌리는 것. 바로 이 시스템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느 날 B&W, 마크 레빈슨, 클라세 등을 검색해보니 참 많은 글들이 나온다. 어지간히 유명한 기기들인가 보다. 삼촌이 가끔 연락 와서는 자기 오디오는 고장 없이 소리 잘 나냐, 날 위한 안부가 아닌, 오디오에 대한 안부를 묻고는 한다. 무엇인가 바뀐 것 같지만, 불만은 없다. 좋은 오피스텔과 시스템을 무상으로 대여 받았으니까. 덕분에 부모님도 삼촌께 연일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고 한다.
오디오라는 것은 참 신기한 것 같다. 같은 음반을 들어도 모두 다른 소리를 낸다. 팔색조의 소리랄까. 사실 먼발치에서 삼촌의 수많은 시스템을 들어본 것이 대부분이지만, 각각의 기기에 특색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하긴 같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해도, 지휘자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아마 오디오도 그런 이유로 큰 차이를 내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스피커가 크면 클수록, 앰프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소리에 힘이 붙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인 개념도 조금은 감이 잡힌다. 이런 게 조기교육인가 보다. 하긴 초등학교 시절부터 삼촌에게 붙잡혀, 엄청 많은 교육을 받았으니까. 그래도 클래식이나 음악이 좋았기에, 사실 그 시절이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기에, 음악에 대한 친근감은 더했던 것 같다. 물론 음반으로 듣는 소리와 내가 연주하는 소리는 왜 이리도 큰 차이가 있는지, 절망감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내 눈 앞의 삼촌의 오디오. 여러 사람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삼촌이 늘 끙끙대면서 무거운 오디오를 오르내리고, 어쩔 때는 숙모와 오디오 대한 언쟁을 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보다 어려운 취미이구나, 하던 생각이 난다. 아마도 이 시스템들도 많은 곤란 속에서 여기로 왔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오디오는 음악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일까. 지금 나에게는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언젠가 나도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는 않을까, 꿈을 꿔 본다.
모델 일도 오디오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서 그에 맞는 최적의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마치 재즈에서는 끈적한 그루브를 선사하고, 클래식에서는 웅장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변하는 팔색조의 미덕처럼, 모델도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말로는 쉽게 이야기하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도 모델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삼촌이 보던 어느 오디오 잡지에 ‘오랜 노력의 진정한 결실’이라는 카피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나도 언젠가 모델로서 저런 멘트를 날릴 수 있을 것을 희망한다.

나이에 걸맞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반을 엄청 사 모았던 것 같다. 용돈을 받으면 곧장 음반 매장으로 달려갈 만큼, 음반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음반의 포장을 뜯고, 내지의 몇 안 되는 사진을 보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리고 삼촌이 좋은 음반 샀다며, 칭찬해줄 때도 기분 좋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샀던 음반은 글렌 굴드 연주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언젠가 TV에서 집중력과 창의력을 높여주는 음반이라며, 소개해줬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두 가지의 음반이 있었는데, 하나는 머리숱이 별로 없는 아저씨가 거만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었고, 또 하나는 피아노에 흠뻑 취한 듯한 정열적인 모습이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의 정열적인 음반. 표지처럼 정말 정열적인 연주가 펼쳐졌다. 하지만 녹음이 잘못되었는지, 히스 음이 좀 들리는 것이 거슬렸다. 내 휴대용 CD 플레이어가 잘못되었나. 나중에 삼촌네에 가서 이 음반을 틀었는데, 역시 히스 음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첫 번째 음반이 결정반이고, 녹음도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처음 히스 음이 들리는 녹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50년대 연주에는 대부분 히스 음이 들린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래도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자는 글렌 굴드이다. 모델 같은 끼가 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참 매력적인 연주자이다.
그렇고 보면 음악은 모델 일에 많은 도움이 된다. 우선 심리적으로 안정을 주기도 하고, 워킹 리듬을 찾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끔은 울고 싶을 때, 시원한 굉음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며, 감상에 젖고 싶을 때, 더 없는 낭만을 주기도 한다. 요즘에는 부쩍 고향인 부산이 많이 생각난다. 그 처연한 파도 소리가 그리도 그리울 수 없다. 역시 가까이 있을 때는 귀중한 것을 모르는 것인가 보다. 그럴 때마다 카라얀 지휘의 드뷔시 바다를 꺼내들고는 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정말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참 재미있다. 오디오를 통해 느끼는 추억이라니….
사실 아직 어린 나이이고, 오디오 마니아라고 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 알고 있는 오디오 브랜드도 몇 개 안 되고, 스펙이니 출력이니 이런 것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디오를 통한 음악의 세계. 음악의 순수한 즐거움.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벅찬 설렘. 이 모든 것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마니아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겨울, 이반 모라베츠의 쇼팽 녹턴을 듣는다. 모델 연습을 마치고 집에서 피로를 풀기에는 제격인 곡이다.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다음 악장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스르륵 눈이 감긴다. 곧 모델로서 꿈꾸는 많은 일들이 눈 앞에 그려진다. 당당하게 내딛는 첫걸음. 피아노의 힘찬 타건처럼 씩씩하다. 이런 꿈을 꾸게 해주는 음악이 그리도 달콤할 수 없다. 눈 앞에 푸른 빛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 사용하는 시스템
스피커 B&W 800 시리즈 1   프리앰프 마크 레빈슨 No.38L  
파워 앰프 마크 레빈슨 No.33, 클라세 오미크론   CD 플레이어 와디아 6  
CD 트랜스포트 와디아 WT2000   D/A 컨버터 와디아 2000   전원장치 파워텍PAV-5000
인터커넥트 케이블 오디오플러스 신포니아 1617
스피커 케이블 오디오플러스 바흐 1750, 오디오플러스 모테트 01
AV 프로세서 인테그라 리서치 RDC-7   DVD 플레이어 데논 DVD-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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