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ody New H88A Sig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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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y New H88A Signature
  • 최상균
  • 승인 2014.06.01 00:00
  • 2014년 6월호 (503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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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 앰프를 선택하는 비이성적인 이유들

스팍(필자 주 : 60년대 TV 시리즈 스타트렉의 등장인물로,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뾰족 귀의 벌컨족)에게 우리 애호가들이 요즘처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아직도 열이 펄펄 나는 진공관 앰프로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면 그는 아마도 인간의 비논리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흔들 것 같다. 그의 생각도 맞다. 진공관 앰프는 논리적으로 보면 분명히 시대적 착오니까. 지금은 진공관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성능이 나은 소자들이 많이 개발되었고, 디지털 증폭 방식이 개발되면서 효율 또한 아주 높아졌으니까. 하지만 우리 인간은 벌컨족과 다르다. 나는 맥코이보다는 스팍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공관 앰프가 좋은 걸 어쩔 수 없다. 다만 스팍이 계속 나의 ‘비논리’에 대해 따져 묻는다면,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자체가 ‘비논리’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충고해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우리들이 멀쩡한 오디오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더 나은 기기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항상 ‘음악의 감동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는 감정의 발로다. 그런데 음악의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최소한, 단지 좋은 기기를 써서 소리가 좋아진다고 해서 음악적 감동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듣는 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던가, 함께 듣는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다던가, 불편한 장소에서 음악을 듣는다던가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음이라도 감동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진공관 앰프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진공관 앰프는 소리를 내기 전에 따듯한 ‘빛’을 낸다. 조명을 낮추고 그 은은한 빛을 바라보면 내 몸과 마음은 차분하게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진공관이 내는 빛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손실’에 해당하지만, 그 ‘손실’이 음악적 감동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조금의 의심도 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가격대에 분명히 더 효율적이고 음질도 깔끔한 반도체 앰프가 있어도 마음은 진공관 앰프 쪽으로 기울 때가 훨씬 많은 것이다.
국내에서 진공관 앰프는 마란츠나 매킨토시처럼 특히 옛날 빈티지 제품들의 인기가 높다. 오랜 세월 수많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음질과 성능이 입증되고, 브랜드도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을 구입해서 운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외관의 상태에 따라 가격이 크게 변화하는데, 어설픈 안목에 의지하다가는 겉모습만 그럴 듯한 제품에 바가지를 쓰기 십상이다, 사용 중에 크고 작은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일일이 대처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충분한 경험을 갖춘 애호가들이 아니라면 빈티지 기기들은 자칫 골칫거리가 될 공산이 크다.
최신 진공관 앰프들은 이런 문제들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롭다. 우선은 고장이 발생할 확률이 적고, 고장이 발생하더라도 체계적인 A/S를 받을 수 있다. 진공관은 당연히 신품이므로 일정 시간 수명이 확실히 보장되며, 내부 부품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대체로 최신 스피커들과 연결하는 것을 상정해서 만들어졌기에 음압이 낮은 다양한 스피커와 매칭도 수월하다. 특히 진공관 앰프는 적당한 출력에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도 합리적인 가격표가 붙은 제품들이 반도체 앰프 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덕목들은 진공관 앰프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생산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번에 리뷰하는 멜로디의 뉴 H88A 시그너처도 우리 시대에 갖춰야 할 덕목을 골고루 지닌 대표적인 진공관 인티앰프다. 대략 십 년쯤 전 H88A 시그너처가 처음 수입될 때 시제품에 대해 간단한 자문 역할을 했었는데, 공들인 외관도 인상적이었지만 내부 회로를 보고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200만원대의 인티앰프에서 보편적인 로터리 볼륨이 아닌 24접점 어테뉴에이터가 태연하게 장착되어 있었고, 정교한 하드와이어링 배선이나 충실한 전원부, 정숙한 트랜스포머 등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시제품에 사용된 부품도 훌륭했지만, 더 고급 부품을 사용해 약간의 음 튜닝이 있었는데, 그 제품은 H88A 시그너처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후 H88A 시그너처는 진공관 앰프의 베스트셀러로 롱런하면서 몇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변화가 겪었다. 3극관 드라이브 회로는 5극관 드라이브 회로로 변했고, 이에 따라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이 변경되었으며, 출력단의 릴레이 보호회로는 음질을 위해 생략되었다. 호블랜드 뮤지캡 커패시터는 멀티캡 PPMFX로, 단자류는 미국 CMC 사의 제품들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모델 이름은 항상 H88A 시그너처로 변함이 없었다. 다른 메이커들이 약간의 변경 후에 MK2나 스페셜 모델로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반해 새로운 이름에 참으로 인색한 멜로디였다.
그런데 최근에 뉴 H88A  시그너처 버전이 탄생했다. ‘뉴’라는 말에 큰 기대를 하며 살펴보았지만 변화된 것은 거의 없다. 사실 이전 제품을 보고 더 이상 변경할 부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을 때도 답변은 회의적이었다. 혹시 진공관 수급이 어려워져서 진공관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니면 가격대가 크게 바뀌는 전제를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싶었다.
‘뉴’ 시그너처를 찬찬히 살펴보니 역시 그랬다. 변화된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편의성 면으로 본다면 아주 큰 변화가 생겼는데, H88A 시그너처가 ‘드디어’ 리모컨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H88A 시그너처가 국내에 소개된 후 인기를 끌면서 ‘여기에 리모컨만 되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애호가들이 줄을 섰지만, 리모컨의 도입은 음질상, 또는 여건상의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있자, 그렇다면 멜로디 밸브 하이파이, 특히 H88A 시그너처에서 고급 부품의 상징처럼 보이던 24접점 어테뉴에이터가 전동 볼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변경은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칫 리모컨이 달린 신 모델의 음이 구형보다 좋지 않다는 이야기라도 나돌면 낭패를 볼 것이 뻔한데, 지금까지 도입하지 않았던 리모컨을 굳이 이제 와서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외관도 약간 변했다. 우선은 멜로디 밸프 하이파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색 일변도에서 탈피해서 절삭 알루미늄 노브를 채용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변화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신선하게 변했다. 그런데 문득 바닥을 보니 지지대의 형상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끝을 둥글게 마무리한 원추형 스파이크가 3점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번 제품은 원통형 알루미늄으로 4점에서 지지하고 있다. 진공관 앰프에서 진동의 효과적인 제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진공관 앰프가 켜진 상태에서 진공관 앰프를 툭 건드려 본 애호가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지지대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인 것이다.

소리를 들어본다. H88A 시그너처는 나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앰프다. 초기 버전에서부터,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때마다 늘 충분히 체크해 왔다. 그런데 뉴 H88A 시그너처는 친숙한 소리를 낸다. 바로 이전에 들었던, 당시 5극관 드라이브 회로로 변경되어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던 최신 버전과 거의 같은 소리를 낸다. 배경이 투명하고 섬세한 고역이 잘 살아나고 무대도 넓다. 쭉쭉 뻗는 고역의 맛은 일품. 저역은 스피디하면서 탄력이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초기 버전과도 비슷하지만, 섬세함과 명확함이 조금 더 두드러져서 현대적 하이파이의 느낌이 가미되었다. 놀랍게도 뉴 버전에서 어테뉴에이터가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전 시그너처에 아무런 변화 없이 리모컨만 새로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지지대가 슬며시 바뀐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섬세한 변화로써 24접점 어테뉴에이터를 전동 볼륨(이 볼륨도 상당히 고급 제품이지만)으로 바꾼 변화를 상쇄시켰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10년 동안이나 리모컨을 달아 달라는 애호가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았을까.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지만, 이젠 이 앰프에서 변경할 만한 부분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스팍에게 이 앰프의 내부를 보여주고 싶다. 아마 이번에도 스팍에게서 좋은 말은 듣지 못할 것 같다. ‘논리적이군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건 부품의 심각한 낭비인데요.’ 하지만 스팍… 넌 오디오를 몰라!

수입원 헤르만오디오 (010)4857-4371
가격 305만원  사용 진공관 KT88×4, XF184×2, 6BA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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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4년 6월호 -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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