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TV 및 통신 기기 제조 업체였던 텔레풍켄이 진공관 업계에서 큰 유명세를 거두었던 시절도 벌써 60-70년 전의 일이다. 현재는 남겨진 유산들이 시장에서 회자될 뿐, 더 이상의 텔레풍켄 진공관은 없다. 그런데 이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독일의 신생 업체 엘로크가 그 주인공이다.
엘로크를 일으킨 인물은 전직 텔레풍켄 직원으로, 18년간 텔레풍켄에서 브라운관을 비롯한 진공관 생산을 담당하던 사업부에서 일을 했던 클라우스 셰퍼니히트라는 인물이다. 박사 학위를 지닌 클라우스는 1979년 텔레풍켄이 브라운관이나 진공관 생산 공장을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폐쇄하면서 이듬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조명 관련 업체로 이직해 생업을 유지했으나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텔레풍켄 시절의 일과 오디오, 음향 기기에 대한 바라는 바를 지울 수 없었다. 결국 1986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함부르크 인근 지역에 현재의 회사인 엘로크를 세웠다.
물론 처음부터 진공관 생산을 주업으로 하지는 않았다. 이미 진공관은 사양 산업이었고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실로스코프용 디스플레이 튜브를 시작으로, 토네이도 전투기와 군용 헬리콥터에서 사용하는 특수 진공관의 개발 및 생산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시켰다. 특히 엘로크의 기술에 노력을 기울인 것은 내구성으로, 이전까지 사용된 산업용 진공관들과 달리 25,000시간 이상의 내구성을 갖춘 특수 관을 개발해 내며 시장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문제는 너무 긴 수명 덕분에 매출이 늘지 않는 아이러니가 생겼고, 여기에 90년대부터 등장한 중국의 저가 CRT와 저가 진공관으로 사업을 다시 재편할 수밖에 없게 되어 오늘날의 오디오용 진공관 사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가 눈을 돌린 것은 211, 845 같은 관들로, RCA 관을 기반으로 하는 프리미어 진공관들이었다. 단순히 복제해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 특성에 맞춰 아예 새로 관을 백지상태에서 자체 설계해 개발한 것이다. 이는 관의 내부 구조에서부터 필라멘트, 플레이트 등의 소재와 형태에 이르는 모든 부분들을 새로 설계하고 튜닝해 새로운 스펙으로 성능을 진화시켰다.
당연히 엘로크의 프리미엄 관들은 큰 호평을 받았고, 오디오 업계에서 서서히 입소문을 내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211과 845의 성공에 힘입어 등장한 것이 바로 엘로크 300B 진공관이다. 2014년에 워킹 샘플을 시작으로, 2016년에 초기작이 등장하고 2018년부터 본격적인 제품이 등장했다.
엘로크의 300B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일단 유리 자체는 고급 인덕션의 상판 유리로도 유명한 독일의 쇼트 사의 유리를 받아, 자체 개발한 디자인의 새로운 300B 튜브로, 전문 업체에서 생산한다. 모두 독일의 소재와 독일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여기에 플레이트와 필라멘트, 그리고 관 내부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꾼 설계로 인해 생김새만 보면 300B와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하지만 성능과 스펙은 기존 300B와 완벽한 호환이 되면서 웨스턴 300B의 450V 플레이트 전압에 비해 높고, 최대 600V의 플레이트 전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출력도 더 높게 잡을 수 있다. 물론 기존 300B 관들과 완벽하게 100% 호환되어 동작하기 때문에 기존 300B 앰프에 관만 교체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웨스턴 300B 관을 레퍼런스로 겨냥하되, 그보다 훨씬 높은 동작 성능과 사양, 그리고 음질로 웨스턴 300B를 능가하는 대체 관으로 완성된 것이 엘로크의 ER300B이다.
엘로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플레이트와 내부 소재를 개선해 새롭게 튜닝한 럭셔리 버전인 ER300B-Mo(몰리브덴)을 내놓았다. 몰리브덴을 플레이트로 사용한 ER300B-Mo는 스펙이 ER300B와 동일하지만 사운드 면에서 훨씬 높은 투명도와 해상력, 그리고 다이내믹을 들려준다. 물론 가격은 기본 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비싸다는 단점은 있지만, 하이엔드 300B 앰프라면 300B 사운드의 끝판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ER300B-Mo이다.
이미 300B 앰프를 사용 중인 유저라면 지금 당장 엘로크의 ER300B 관으로 교체를 시도해 보길 권한다. 일거에 달라진 앰프의 성능에 300B 사운드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조만간 ER300B 관을 사용한 진공관 앰프 테스트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