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쿤 포노 소리에 반하다
지금까지 들었던 LP 소리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광 카트리지로 스콜피온스의 ‘Holiday’를 들었을 때고,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 턴테이블과 직스 카트리지 조합으로 카미야 이쿠요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을 들었을 때다. 아날로그는 힘이 세다, 아날로그는 투명하다, 이 2가지를 깨닫게 해준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정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순간의 명장면은 바로 일본 바쿤 프로덕츠의 여러 포노 앰프로 들은 LP 소리다. 파워 앰프 AMP-5570과 합심해 윌슨 오디오 알렉시아 2를 몰아붙이던 EQA-5620 MK3, 직접 구매해 다양한 포노 EQ 재생 재미에 푹 빠졌던 CAP-1004, 그리고 가장 작은 사이즈에 가장 저렴한 가격표를 단 CAP-1002다. 예컨대 CAP-1002로 들은 프리츠 라이너 지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의 ‘전람회의 그림’ 시청 메모는 이랬다. ‘첫인상은 기름기가 싹 가신 소리라는 것. 적막한 배경에 소릿결이 촉촉하다. 음이 성기지 않으면서 알이 꽉 찬 점도 마음에 든다. 평소와 가장 다른 점은 지저분한 노이즈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 바쿤 앰프의 가장 큰 미덕은 SNR인데, 미세 신호를 다루는 포노 앰프에서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한마디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말쑥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음이다.’

바쿤 포노 앰프 라인업
현재 바쿤 포노 앰프 라인업은 가장 비싼 EQA-5640 MK4, 조립 키트 형태로 나온 BMK-1003, 그리고 콤팩트 사이즈의 CAP-1004와 CAP-1002 MK2로 짜여 있다. CAP-1004가 2020년, EQA-5640 MK4가 2021년, BMK-1003이 2023년, CAP-1002 MK2가 2025년에 나왔다. 바쿤 수입사인 바쿤매니아에 따르면 앞서 언급했던 EQA-5620 MK3(2013년 출시)에 대한 후속 신제품 요청이 빗발친다고 한다.
EQA-5640 MK4는 무려 6개의 포노 EQ 커브에 대응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 표준 RIAA를 비롯해 NAB, 콜롬비아, FFRR, AES, RCA, 이렇게 6개다. 또한 MC 카트리지 사용 시 전류 신호로 입력 받아 S/N비를 높인 점이 돋보인다(MM 카트리지는 전압 입력). 게인은 6개(하이1, 하이2, 미드1, 미드2, 로우1, 로우2) 중에서 고를 수 있다.

CAP-1004 역시 6개의 멀티 포노 EQ 커브에 대응하지만, 게인을 4단계(0dB, -10dB, -20dB, -30dB)로 줄였고, MC 카트리지 역시 MM 카트리지처럼 전압 신호로 입력받는다. 이에 따라 EQA-5640 MK4에서 수 Ω에 불과했던 MC 입력 임피던스가 100Ω으로 늘어났다. 같은 신호라도 입력 임피던스가 낮으면, 전류 신호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MM 입력 임피던스는 EQA-5640 MK4와 동일한 47㏀.

CAP-1002 MK2는 표준 RIAA 커브에만 대응하는 대신 MC 카트리지 신호를 전류 신호로 받아 사트리 회로의 장점을 더욱 살렸다(MM 카트리지는 전압 입력). MK2가 되면서 최신 4세대 HBK 회로를 투입했고 S/N비를 최대 -155dB라는 경이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게인은 로우와 하이 중에서 고를 수 있다. 출력 버퍼 회로에는 앞의 두 앰프와 마찬가지로 HBFBC 회로가 투입됐다.

바쿤 포노 앰프 작동 메커니즘
바쿤 포노 앰프의 작동 메커니즘은 여느 포노 앰프와는 확실히 다르다. 바쿤의 상징과도 같은 사트리 회로(HBK 회로) 덕분인데, 무엇보다 MC 카트리지 신호를 전류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점과 게인 확보와 포노 EQ 보정이 한 곳에서 이뤄지는 점이 특징이다. 사트리 회로 자체가 전류 입력 → 전류 출력의 커런트 미러 회로를 근간으로 삼았고, 사트리 회로에서 게인을 책임지는 뒷단 저항이 포노 EQ 보정 회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쿤 포노 앰프의 작동 메커니즘은 크게 5단계로 이뤄진다. 입력 → HBK 회로 → 포노 EQ 보정 회로 → HBFBC 버퍼 회로 → 출력 순이다.

HBK(히비키) 회로는 SATRI(사트리) 회로의 진화형. 사트리 회로는 전류 신호가 입력돼야만 작동하는 회로라서 예전에는 앞단에 V/I 변환 과정이 필요했지만, HBK 회로에서는 전압 신호가 들어와도 별도 V/I 변환 과정 없이 사트리 회로가 곧바로 작동한다. HBK 칩에 전압 입력(Vin), 전류 입력(Cin) 단자가 함께 있는 이유다. V/I 회로를 없앤 것은 이 변환 과정에서 음질 손실이 이뤄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포노 EQ 보정 회로(포노 이퀄라이저)는 HBK 회로를 빠져나온 전류 신호를 전압 신호로 바꿔주는 I/V 변환 역할을 하는 동시에 게인도 확보한다. 바쿤은 기본적으로 2개 저항(R1, R2)의 저항비로 게인을 얻고, 바쿤의 포노 이퀄라이저 CR 회로에 이 R2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걸지 않는 점도 음의 순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만하다.

HBFBC 회로는 버퍼 회로. 포노 이퀄라이저를 빠져나온 전압 신호의 높은 출력 임피던스를 크게 낮춰, 뒤에 오는 프리앰프나 인티앰프와 매칭 시 에너지 손실을 없게 한다. HBFBC(HyBrid FET Buffer Circuit)에 ‘하이브리드’가 들어간 것은 FET와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상하 대칭 푸시풀로 썼기 때문이다.

사트리 회로가 LP 재생에서 유리한 이유
이쯤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왜 사트리 회로(HBK 회로)가 LP 재생, 특히 MC 카트리지 사용 시 다른 포노 앰프에 비해 유리할까. 다음은 필자가 생각하는 그 이유다. 먼저 사트리 회로 자체가 증폭의 리니어리티가 떨어지는 트랜지스터 대신 2개 저항의 저항비로 증폭을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HBK 회로가 되면서 음질에 손해를 끼치는 앞단의 V/I 변환 회로마저 없앴다.

두 번째는 게인을 확보하는 과정이 승압 트랜스나 헤드 앰프 도움 없이 1단계에 그치기 때문에 증폭의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게인 자체가 포노 이퀄라이저에서 확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노 이퀄라이저 커브에 따라 게인 값이 변하고, 이 덕분에 특히 고음에서 클리핑이 일어날 확률이 적다. 예를 들어 사트리 포노 앰프와 궁합이 특별히 좋다고 알려진 새틴 M-116 MC 카트리지의 경우, 전압 입력이든, 전류 입력이든 고주파로 갈수록 게인값이 우하향을 보인다(전류 입력 시 70Hz → 220mV, 200Hz → 210mV, 1kHz → 200mV, 6kHz → 195mV, 10kHz → 150mV). 이에 비해 통상의 포노 앰프는 게인 스테이지와 포노 이퀄라이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고음에서 클리핑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게인 값은 일정한데, 포노 EQ 보정 커브(De-emphasis 커브)는 우하향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결정적으로 MC 카트리지 사용 시 전압이 아닌 전류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MC 카트리지 출력은 MM 카트리지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0.5mV 수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압 기준이고 실제 빠져나오는 전류 값은 MM에 비해 훨씬 높다. 카트리지 내부 임피던스가 대개 수 Ω 정도로 아주 낮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바쿤 프로덕츠 설립자이자 현역 엔지니어인 나가이 아키라 대표가 예전 흥미로운 측정값을 공개한 적이 있다. 동일한 MC 카트리지를 전압 신호로 받을 때와 전류 신호로 받을 때의 사트리 포노 앰프 출력값을 비교해본 것. 많은 분들이 사용하시는 데논 DL-103의 경우 전압 입력 시에는 평균 출력 전압이 6.16V였지만, 전류 입력 시에는 평균 출력 전압이 33.8V로 크게 늘어났다.

같은 신호에 같은 포노 앰프라도 이렇게 출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S/N비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뜻이 된다. MC 카트리지의 낮은 출력 전압을 끌어올리기 위한 승압 트랜스나 헤드 앰프가 필요하지 않은 점도 대단한 이득. 필자가 바쿤 포노 앰프를 들을 때마다 ‘말쑥하다’와 ‘힘이 넘친다’ 느낌을 받는 것은 단순한 선입견이 아니라, 이렇게 여러 확실한 근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