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오디오 시스템의 조건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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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오디오 시스템의 조건은 무엇일까?
  • 정재천
  • 승인 2024.07.08 10:47
  • 2024년 07월호 (624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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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 씨 - 정창관의 국악 음반 세계(www.gugakcd.kr)
자신이 애청하는 국악 음반을 재생하는 오디오 기기와 함께한 국악 애호가 정창관 씨. 그는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모든 국악 관련 음반을 모으고, 정리해 자신의 홈페이지 ‘정창관의 국악 음반 세계(www.gugakcd.kr)’에 소개하고 있다. 요즘은 신보가 많이 나오지 않아 업데이트 횟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우리는 종종 오디오 기기가 하드웨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소프트웨어인 음악을 제대로 재생하는 데 필요한 것이 오디오 기기, 즉 하드웨어인데 말이다. 대부분의 오디오 애호가는 음악을 감상한다는 본질적 행위에서 파생된 오디오 교체 욕구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총각 시절에 구매한 오디오 시스템이 아직도 현역기로 작동하고 있는 정창관 씨에게 소리 재생의 틀인 오디오 기기를 바꾸는 일은 다른 세상 얘기다. 오죽하면 제작자인 이광수 소장이 ‘정 선생 같은 분만 있었으면 오디오 제작자는 모두 굶어 죽었을 거요’ 라고 농을 건넸을까. 그의 시스템 중에서 교체된 것은 우퍼 콘지가 헤져 부득이 방출한 AR3a가 유일하다. 현재는 로저스 스튜디오 1 스피커가 소리의 출구가 되고 있다. 이 스피커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정씨의 음반 재생은 40년 세월을 이긴 이연구소의 L220 파워 앰프와 SL5M 프리앰프가 담당한다. 파워 앰프는 6CA7(EL34) 출력관을 3극관 결선으로 한 푸시풀 회로로 구성되어 있다. 프리앰프는 부궤환 방식의 포노 등화 회로와 캐스코드 방식의 라인 앰프단을 가진 진공관 방식이다. 사용 기간 중 고장이 두 번 발생했는데 이연구소에서 무상으로 수리해 줘 잘 쓰고 있다고 한다. 

LP 시대가 저물고 이어 CD가 발매되었을 때 어떠한 기기를 구매할 것인가를 놓고 오디오 동호인들과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두 번의 테스트를 거쳐 선정된 것이 인켈의 CD-5010G CDP. 이후 SACD가 발매되면서 마란츠의 DV8300 SACD·DVD 플레이어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수집했던 클래식 음반 목록. 그가 얼마나 레코드 음악 감상에 몰입했었는지를 알려준다. 국악에 눈을 뜬 이후 그의 음반 수집은 자연스레 국악 CD로 모아졌고 많은 LP는 방출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 클래식을 주로 감상하던 정씨에게 1990년도에 월간지 ‘음악동아’의 부록으로 나온 ‘클래식 레코드 총목록’은 참고서와 같았다. 이 책자를 교본 삼아 음반을 수집하고 감상했다고 한다. 한때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음반만 550장을 수집했다고 하니 ‘마니아’라는 호칭이 붙을 만하다. 그럼에도 오디오 마니아로 불리는 것은 극구 사양하고 있었다.

미 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낸 ‘1896년 유학생 아리랑’ 음반이 에디슨 실린더 유성기에서 재생되고 있다. 정창관 씨가 영국에서 복각한 것이다. 

그가 수집과 복각에 열정을 더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실린더형 유성기 음반과 SP 음반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발굴해 복각한 원통형 음반 ‘1896년 유학생 아리랑’ 스무 장을 국내 오디오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공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실린더 음반과 SP 음반 두 종류로 제작했는데, 원반의 희소성과 높은 가격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기관과 개인들이 많이 구매했다고 한다.

에디슨 2분 재생용 유성기, 4분 재생용 유성기와 레코더를 장착한 2분 녹음용 유성기가 보인다. 2분용 유성기는 왁스 원통 음반에 바로 녹음할 수 있는 것이다. 백여 년 전 회사에서 사장이 비서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 쓰던 6인치 원통 녹음기도 있다. 모두 정상 가동되는 기기들이다.

장사익 씨에게 음원을 받아 영국 벌컨(Vulcan) 실린더 레코드사에서 원통형 음반으로 2018년 제작한 ‘봄날은 간다’를 100년이 넘은 에디슨 유성기로 들어보았다. 금속 바늘이 실린더의 음구를 지날 때 나는 치찰음과 장사익의 노랫가락이 어우러져, 막걸리에 취한 동네 어른이 정자나무 밑에서 부르던 오래전 육자배기 한 자락을 듣는 듯했다. 행복하고도 포근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방에 빼곡한 원통형 음반. 그는 국악과 관련된 음반을 모으고, 복각하고, 제작하여 우리의 음악 역사를 알리는 일을 한다. 

21세기에 에디슨이나 콜롬비아 등에서 발매된 실린더 유성기에 사용할 실린더 레코드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주로 플라스틱 수지로 만든다고 하는데, 2분이나 4분 재생용. 5.5cm 직경의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국악 음반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1987년 클래식 음악에 빠져 2천 장 정도의 음반을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판소리가 듣고 싶어 신나라 레코드 매장을 찾았으나 발매된 음반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클래식 음반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게는 충격이었다. 듣고 싶어도 살 수 있는 음반이 나오질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국악 음반은 수요가 없어 제작해 봐야 수지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내가 직접 판을 만들어 보자. 뜻이 맞는 세 사람이 모여 본격적으로 국악 음반 제작을 시작한 최초의 결과가 바로 판소리 다섯 명창 음반이다.’

복각판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빈덱스(Vindex) SP 유성기에서 재생되고 있다. 잡음이 많지 않고 음질이 좋아 들을 만했다. 

세 사람이 음반을 직접 제작해 음반사에 공급하기 시작한 즈음, 국내에도 서서히 국악 음반 제작 붐이 일어났고 기성 음반 제작사인 신나라 레코드나 성음 제작소, 그리고 LG, 삼성에서도 국악 음반이 나왔다. 국악 음반 제작의 황금기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18년간 국악방송을 통해 매주 3장의 국악 음반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일에 열정을 바친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국악 음반을 모두 가지고 있다. 2020년 정부는 국악 사랑과 보급 열정을 인정해 화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훈장증에 명기된 ‘국악 애호가 정창관’이라는 호칭이 어느 다른 직함으로 소개된 것보다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사용한 마이크로 세이키 BL-77 턴테이블과 오디오 테크니카 AT-PL120 턴테이블. 벨트 구동 방식인 BL-77은 최초 구매 시 여분의 벨트를 같이 구매했지만, 문제가 없이 작동되고 있어 그 벨트는 아직도 예비품으로 남아 있다. 78회전 SP 재생을 위해 마련한 오디오 테크니카 턴테이블은 저가의 기기지만 음반 재생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국악기의 음을 재생하기 위해 필요한 오디오 특성은 무엇인가? 정씨가 한 세트의 진공관 오디오 기기만으로 평생 동안 음악에만, 특히 국악에 몰두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40년 정도의 세월동안 오디오 음악을 즐기는 애호가라면 적어도 열 번 이상의 기기 변경은 당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국악을 주로 듣는다는 그의 설명에 착안해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가설 : 국악기의 음향 특성 때문이다.’ 이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검색 사이트(사이언스 온)에 ‘국악기 음향 특성’이라는 주제어를 넣어 보았다. 총 1807여 건의 논문과 특허, 보고서가 검색된다. 공개된 573편의 논문 중 몇 편을 읽어 보았다. 이 중 충북대 건축과와 KAIST 기계공학과 소음 및 진동 제어 연구 센터에서 국악기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흥미로워 여기 소개한다. 결론적으로 국악기의 음향 방사 특성과 주파수 특성은 클래식 악기와는 많이 달랐다.

국악기의 음향 방사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논문에서는 19개의 마이크를 1.5m 반경으로 배치해 대표적인 국악기인 거문고, 해금, 피리, 태평소, 북, 꽹과리, 징, 남성 창 등 총 8종의 국악기에 대한 음향 특성을 조사했다. 그림은 소리꾼을 앉혀 놓고 정면과 측면에서 바라본 마이크 배치도이다. 

본 논문에서 측정한 국악기의 주파수 대역은 1kHz를 기준으로 한 옥타브 밴드로, 250Hz-4kHz의 범위. 125Hz 이하의 저주파수는 마이크 고정 장치 때문에, 그리고 8kHz 이상의 주파수는 마이크로폰의 최적 주파수 범위를 넘기 때문에 측정하지 않았다. 논문을 읽다가 음원 재생 프로그램인 푸바2000에서도 다양한 소리 파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쳐, 국악 음원을 재생하면서 주파수 스펙트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사용된 음원은 ‘정창관 국악 녹음 2집과 3집’. ‘조순애의 여창 단가와 김영택의 서도 소리’다. 과연 논문에서 설명한 대로 남성과 여성 가객이 소리를 내는 주파수 대역은 서로 달랐다. 남성은 500Hz 대역에서 그리고 여성은 1kHz 대역에서 각각 두드러진 스펙트럼이 나온다. 이 실험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은, 북장단이 주파수에 미치는 효과였다. 고수가 북 중앙을 북채로 두드릴 때 나는 소리는 중·저역 주파수 대역을 채워 주고 있었다. 또한 북 테두리를 채로 칠 때 내는 소리는 중·고역을 채워줘 소리꾼의 좁은 소리 대역을 넓게 확장시켰다.

여성 명창 조순애의 단가 소리(정창관 씨 1999년 제작 음반)를 푸바2000 스펙트럼으로 관찰한 것이다. 여성 가객 소리만 있을 때 좁은 대역의 스펙트럼이지만(왼쪽) 북장단이 더해지면 넓은 주파수 스펙트럼을 갖는 광대역의 음장감 있는 소리로 바뀐다(오른쪽). 판소리나 단가에서 고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알게 했다. 

논문에서는 성악을 포함한 국악기의 주파수에 따른 잔향 시간도 측정하였는데, 모든 악기의 주파수가 높아짐에 비례하여 잔향 시간이 짧아지는 일반적인 특성을 보였다. 125Hz 대역에서 1.4초 이상의 잔향이 발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8kHz 대역에서는 0.6초 정도로 잔향이 줄어들었다. 악기에 따라 소리의 공간 분포도 매우 달랐는데, 수평과 수직 음향 분포도 악기마다 제각각이었다. 국악기의 주파수별 음압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고수가 북 테두리를 채로 강하게 타격할 때 음량은 1000배 이상 급격하게 커진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 볼 때, 국악을 즐기기 위한 오디오 시스템 특성은 서양 음악을 즐길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국악의 특징인, 클래식 대비 상대적으로 넓지 않은 대역폭, 악기 연주 간의 급격한 음압 변화, 악기마다 다른 공간 음향 분포 특성 등은 진공관 앰프로 재생될 때 가장 잘 들어맞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정창관 씨는 국악의 특징을 ‘여백의 미’로 정의했다. 서양화가 각종 색의 현란함을 특징으로 한다면 동양의 수묵담채화는, 비우고, 채우고, 번지는 여백의 미가 있는 것처럼, 국악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씨와의 대화 중 ‘우리에게는 우리 소리에 반응하는 DNA가 존재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먼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소리의 유전자가 우리의 혈관을 흘러 장중한 정악과 만날 때, 비록 한 번에 귀와 몸이 반응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차례 들으면서 곱씹어 보면 무릎을 탁하고 치게 되는 순간이 올 테니, 긴 여름 덥다고 짜증 내지 말고 열이 펄펄 나는 진공관 앰프와 함께 국악을 즐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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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24년 07월호 - 6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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