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란츠 7, 그리고 오디오 리서치 레퍼런스 1 프리앰프

2014-03-01     김기인
80년대 말 겨울, 최초로 간 미국 출장길에서 돌아오는 필자의 가방 속에는 오디오 리서치의 프리앰프가 들어 있었다. 눈이 많이 온 워싱턴의 환상적인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디오 숍에서 음악 듣기에 바빴다. 미국 오디오 숍은 모든 제품을 구비하고 고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주문에 의해 본사로부터 배송 받아 전달해 주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요구됐다. 출장 시간에 맞춰 배송 확인을 받은 다음 원하는 오디오 시스템들의 여러 가지 구성을 맘껏 즐겼다. 그 숍에는 방마다 가격대별로 잘 매치된 시스템들이 데모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오디오 리서치는 카운터포인트 앰프와 함께 세계 하이브리드 앰프의 쌍두마차였다. 융통성 없이 정확하게 자로 잰 듯한 소리를 들려주는 카운터포인트보다는 오디오 리서치에 필자의 관심이 쏠렸는데, 그 이유는 전체적 음색이 마란츠 7C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빈티지로는 마란츠 7C가 필자의 드림 프리앰프였지만, 기계적 완벽성이나 사운드의 투명성 등에서 추구하는 바를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소견으로 (현재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디오 리서치 SP8에 눈을 돌렸었다. 지금 같으면 SP8보다는 SP6이나 SP4 같은 구형 오디오 리서치에 더 끌렸을 것이지만 당시로는 SP8의 음색이 필자의 요구를 더 만족시켰었다. 오히려 중고 SP8을 구매하는 것이 미국의 실정상 저렴한 구매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신품 SP8을 박스로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눈 온 워싱턴 거리처럼 은백의 SP8 전면 패널은 눈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어깨를 누르는 SP8의 무게도 잊은 채 비행기 안으로 끌고 들어온 SP8의 가방은 귀국하는 피곤한 비행기 여행의 고통도 잊게 해 줬다.



SP8을 가지고 들어와 새 제품을 제대로 들어 보기도 전에 모든 진공관들을 텔레풍켄 각인관과 지멘스 금핀 관으로 바꾸며 음색을 튜닝해 나갔다. 특히 포노부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자 꾸준하게 음악을 듣는 것에 몰두할 수 있어 한동안 바꿈질 없이 오디오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후배 집에서 들은 마란츠 7의 고아한 음색에 끌려 갑자기 SP8이 미워져 버리고 말았다. SP8에 마란츠의 고아하고도 깊이 있는 음악성을 덧붙이기 위해 별짓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상급기인 SP10으로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중고 제품이지만 신품에 가까운 퀄러티를 유지하고 있어 완벽한 음색을 들려줬다. 물론 튜닝과 진공관 교체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지만 필자만의 음색을 가지고 마란츠 7과 비교 테스트하기에 이르렀다. 해상력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마란츠 7의 품격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SP10을 한참 쓰다가 결국 마란츠 7로 필자의 레퍼런스 프리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마란츠 7은 영원한 필자의 프리처럼 느껴 오다가 웨스턴의 트랜스 프리나 랑게빈의 트랜스 프리가 유혹할 즈음 우연히 필자의 손에 들어온 프리가 오디오 리서치의 레퍼런스 1 프리앰프였다. 레퍼런스 프리답게 정교하고도 육중한 몸매를 갖추고 있었고, 모든 기능은 리모컨으로 원격 조정되는 첨단 제품이었다. 내부는 릴레이 보드, 전원 보드, 증폭 보드의 3개 PCB로 구성되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6922를 각 채널 4개씩, 총 8개를 사용해 풀 밸런스 회로를 구성한다. 물론 언밸런스 인·아웃 단자도 마련되어 있으며, 전면 패널에서 선택 가능하다. SP8과는 달리 블랙 헤어라인 마감이어서 더 힘찬 느낌을 줬는데, 마감 처리가 훨씬 정교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뒷면 단자도 일목요연하게 밸런스와 언밸런스로 구분해 장착시켰고, 내부 배선 정리도 깔끔하면서도 정밀하게 나무랄 것이 없었다. 물론 전원부는 TR에 의한 레귤레이팅이 철저한 관리 시스템을 목적으로 세심한 곳까지 배려했고, 튜브는 소련제 선별관을 쓰고 있었다. 결국 하이브리드 프리앰프라 말할 수 있는데, 소리 또한 하이엔드 성향을 띠고 있었다. 정교하고도 투명하며 디테일 표현이 발군이다. 따라서 현이 좋았고, 리모컨으로 동작시키는 재미도 있었다. 진공관 프리앰프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확실히 보여 주는 중량급 프리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란츠 7에 비한다면 훨씬 정교한 음결을 보여 준다고나 할까. 뭔가 섬세함이 앞서고 투명도가 좋다. 그렇지만 음악성 면에서 뭔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서운함은 붙어다녔다. 욕심 같아서는 두 대의 프리앰프를 번갈아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각자의 매력이 넘친다. 현대의 투명하고 박력 넘치는 스피커 시스템에는 한 번 사용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리라는 생각이다.



이제는 각자 프리앰프의 영역에서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빈티지 프리가 최고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또한 진공관이나 트랜스 프리가 정답이라 얘기할 수도 없다. TR 프리는 그 나름의 맛이 있고, 진공관 프리 역시 그 나름의 멋이 있을 뿐이다. 프리앰프 자체의 결정적 음질 요인보다 앰프를 다루는 마니아들의 프리앰프에 관한 안목과 표현되는 음색에 관한 깊은 이해가 오디오를 즐기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필자 스스로도 프리앰프에 관한 편견과 방황으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제 와서는 각 프리의 있는 그대로의 음색을 충실하게 즐길 뿐이다. 맥은 같이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길로 서로의 음악적 표현의 한계를 높인 두 프리앰프로 편견을 없애기 위한 비교 시청을 해 본다. 마란츠 7이 오래된 와인이라면 오디오 리서치는 잘 몰딩된 위스키다. 둘 다 즐기는 데 필요하며 맛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