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do
전설의 메이커 그라도에 관해서
2012-08-01 월간오디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라도는 다양한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다. 스피커, 턴테이블, 나무 재질의 톤암 등이 이 시기에 나왔으며, 특히 톤암은 지금도 빈티지 애호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러다 1963년에 카트리지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2년간의 연구 끝에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른다.여기서 그라도만의 특별한 카트리지 기술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 사실 카트리지라는 것은 LP의 그루브에 스타일러스가 접촉하는 것으로 신호 전송이 시작된다. 이것은 캔틸레버, 마그넷, 코일 등으로 연결되어 나중에 포노단으로 들어간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손실이 없는 전송을 하냐가 관건이 된다. 이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레조넌스다. 이를 위해 그라도는 OTL(Optimized Transmission Line)이라는 기술을 쓰고 있다.이 방법론은 아주 간단하다. 각각의 단계에 쓰이는 알로이를 모두 다르게 투입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속이 비었고, 어떤 것은 단단하다. 따라서 공진 주파수 대역이 모두 다르므로, 어느 한쪽에 공진이 생기면 다른 쪽이 흡수하는, 일종의 댐퍼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캔틸레버엔 특별한 코팅을 실시한 바, 레조넌스를 줄이는 효과를 얻고 있다. 그 덕분에 매우 정숙하고, 사운드 스테이지가 넓으며, 디테일이 풍부한 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이런 노력 끝에 1976년에는 조셉 그라도 시그너처(이하 JGS)의 카트리지가 탄생하는데, 당시로는 처음으로 1천불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84년에 나온 JGS 톤암 역시 중요한 제품으로, 지금도 이것을 찾는 애호가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CD의 출현으로 서서히 아날로그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50만개씩 팔리던 카트리지의 경우, 90년에 이르면 12,000개로 줄어든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결국 오디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조셉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게 바로 헤드폰이다. 80년대 말부터 시작한 그의 연구는, 90년에 새로 사장에 취임한 그의 조카 존 그라도에 의해 꽃을 피운다.존 그라도는 12살 때부터 삼촌 공장의 마루를 청소할 만큼, 일찍부터 오디오 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디오가 아닌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브루클린 테크니컬 고교를 나왔지만,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형법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졸업 후 결국 그라도에 입사한 그는 90년에 정식으로 CEO가 되면서, 카트리지로 전 세계를 제패한 그라도의 명성을 회복하는 과업을 부여받게 된다.
본격적으로 헤드폰에 집중한 존의 정책 덕분에 그라도는 프리스티지 시리즈를 내놓게 된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대단한 이 시리즈는 특히 SR60이라는 히트작으로 그라도의 부흥에 큰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목재가 투입된 레퍼런스, 스테이트먼트 시리즈를 런칭하면서, 그라도는 제2의 황금기를 이룩하게 된다. 이때 나온 RS1, GS100 등은 생산이 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애호가들이 찾는 아이템이 되었다. 여기서 잠깐 그라도만의 헤드폰 기술을 짚고 넘어가자. 가장 큰 특징은, 진동판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진동판 자체는 폴리머를 중심으로 한 복합 물질로, 진폭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광범위한 주파수 대역을 커버하고 있다. 네오디뮴을 이용한 마그넷 시스템은 효율을 극대화시켰고, 무산소 동선을 동원한 배선은 신호 전송에 있어서 최대한 순수성을 보장한다. 그래서 그라도의 제품을 들으면, 마치 잘 만들어진 풀레인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이 연상되는 것이다.2008년에 와서, 존은 엄청난 결심을 한다. 바로 전체 라인을 모두 업그레이드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이듬해에 'i' 시리즈가 나왔고, SR60부터 GS1000까지 전 제품이 모두 업그레이드되었다. 또 PS1000이라는 플래그십 모델이 나와 많은 애호가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기도 했다. 이즈음 존은 그의 두 아들 조나단과 매튜를 별도의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 이들이 집중한 것은 인 이어(In-ear) 방식의 제품으로, 우리가 흔히 이어폰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iGi, GR8, GR10 등의 제품이 나왔다. 이로써 그라도는 3대째를 향해 움직이게 되었는데, 부침이 심한 이 업계에선 매우 드문 일이다. 한편 존은 아날로그 르네상스에 맞춰 카트리지 부문에도 과감히 손을 댔다. 특히, 헤드폰에 투입한 목재의 가능성에 주목,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그 결과 카트리지의 전자기 회로에서 발생하는 공진에 의한 왜곡을 획기적으로 줄이게 되었다. 특히 프리스티지 시리즈는 저가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무려 10배나 비싼 카트리지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성과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라도가 창업한 지 어언 60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조셉 그라도는 살아서 파스텔화를 그리고 있고, 그의 부친이 운영했던 청과물상의 건물은 지금도 작업장으로 쓰이고 있다. 홈페이지에 가면 그 작업 현장을 볼 수 있는데, 역시 마란츠 7 프리가 한구석에 놓인 대목이 눈길을 끈다. 또 이곳에서 쓰이는 레퍼런스 시스템 중 스피커들은 모두 그라도에서 제작한 것으로, 하나는 동사의 헤드폰에 투입되는 풀레인지 유닛을 네 개 배열한 다음 커다란 우퍼를 단 모델이다. 또 하나는 무려 32개의 유닛을 위 아래로 길게 라인 어레이 방식으로 배열한 쳄버에 별도로 우퍼를 더한 포름이다. 사실 헤드폰에 쓰이는 유닛이 정식으로 스피커에도 사용된다는 것은, 그 드라이버가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작업장 한 구석엔 45년 된 플라스틱용 인젝션 몰딩 머신이 작동하고 있고, 모든 직원은 순수 미국인들이며, 이 중엔 꽤 나이가 든 장인들도 보인다. 참, 미국 회사치고 이런 정경을 보여주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런 면에서 그라도는 100% '메이드 인 U.S.A.'에 대한 신화와 믿음이 존속하는 소중한 유산이라 평하고 싶다. 그래서 그라도의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단순한 구매 행위를 떠나 일종의 역사와 전통과 장인의 미덕까지 함께 손에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