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위안의 소리를 찾아 나선 여정
기장군 박춘식 씨
이번 애호가 탐방의 주인공은 박춘식 씨다. 그가 살고 있는 기장군은 월내부터 대변항에 이르기까지 긴 해안선이 이어진다. 바닷가에 나가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미역과 다시마 양식장이 즐비하다. 5월 중순이 되면 부쩍 커진 미역과 다시마를 걷어 올려 제법 따스해진 한낮의 햇살에 건조시키는 손길이 분주하다. 산모들에게 좋다는 기장 미역이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여기다.
잠수사(潛水士)인 박 씨는 수심 35m의 물속에서 일한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암흑과 같은 곳인 이곳에서 그는 미역과 다시마 포자를 심은 씨줄을 양식장에 설치하고 가라앉지 않도록 부표를 설치해 왔다. 물속에서 그는 소리의 본질을 생각한다. 공기를 매질로 전달되는 육지의 파동은 물이라는 밀도 높은 물질과 만나 전혀 다른 음향을 물속 깊이 전달한다. 그의 침잠과 사유의 공간은 그에게 잠수병이라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질환을 흔적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물속에서 찾은 소리의 세계는 그에게 회복의 원천이 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진행형인 갤러리 시스템
박 씨가 기장 달음산 자락 광산마을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갤러리를 오픈하는 것이다. 소소한 생활 소품을 모아 전시하고 음악도 즐기는 공간을 꾸며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로 계획했던 그의 프로젝트는 여러 어려움이 있어 7년째 진행 중이다. 현재는 지인들을 모아 음악도 듣고 지난 시절의 소품들에 담긴 추억을 나누는 장소로 애용 중이다.
이곳의 주력기는 바이타복스의 코너형 스피커인 CN-191이다. 국내에서 복각된 인클로저에는 15인치 우퍼와 클립쉬가 설계한 혼 스피커가 중·고역을 담당해 가청 대역을 모두 커버한다. 100dB가 넘는 높은 능률로 저출력의 싱글 앰프부터 EL34나 KT88 출력관을 이용한 푸시풀 앰프와도 잘 맞는다고 하는데, 현재는 매킨토시 C22 진공관 프리단을 거쳐 매킨토시 MC 2300 대출력 트랜지스터 파워 앰프와 매칭시키고 있다. 알텍의 모델 1590E 파워 앰프 역시 트랜지스터 구성인데 번갈아가며 바이타복스를 울린다. 깔끔하면서도 선명한 소리가 좋아 반도체식 앰프를 애용하지만 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진공관 기기 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한단다.
소스로는 매킨토시 MCD7007 CD 플레이어를 주로 이용한다. 구수하고 모나지 않은 소리가 좋다고 한다. 갤러리에는 3000여 장의 LP와 CD를 보유 중인데 턴테이블보다는 CD 플레이어에 손이 더 많이 간단다.
그의 갤러리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모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때론 순박하다. 갤러리가 위치한 곳이 일제 강점기에 구리 광산으로 개발된 깊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해도 왠지 스산함까지도 느껴지는 소리였다. 클립쉬 혼과 바이타복스 대형 혼 시스템에 관심이 마음자락 이곳저곳에서 자라난다.
갤러리의 빈티지 컬렉션
박 씨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컬렉션은 오래된 라디오와 TV이다. RCA 진공관 라디오부터 콘솔형 리시버까지 다양한 기기를 모아 놓았는데 가끔씩 전기를 먹이고 닦으며 향수에 젖기도 한다.
자택 리스닝 룸
최근 박 씨는 자신의 청취 공간을 다시 꾸몄다. 인테리어를 청취 환경에 맞게 꾸미고 음향판의 위치를 바꿨다. 이곳의 콘셉트는 빈티지와 DIY이다. 300B 싱글의 자작 진공관 파워 앰프 한 조와 암펙스 620 일체형 기기에서 6V6 푸시풀 앰프부만 분리한 두 번째 파워단을 꾸몄다.
이 기기에 신호를 공급하는 프리앰프는 RCA Victor의 MI-9268 모듈을 이용해 만든 라인 앰프이다. 12AY7 쌍3극관을 이용한 증폭단과 밸런스 입력용 트랜스가 붙어 있는 모듈이 두 개 채용되었고 전원 공급을 위해 정류관식 전원부가 추가된 제품이다.
소스로는 소니의 CD 플레이어를 주로 사용하고 렉시콘의 CD와 DVD 복합기로 음악과 영상을 재생한다. 배경 음악이 필요할 때는 마란츠 튜너도 종종 사용한다. 오포의 블루레이 플레이어로 영화를 감상하기도 한다.
스피커는 모두 조립품이다. 이소폰 15인치 우퍼에 시네마메카니카 혼 드라이버를 90도 꺾인 혼을 이용해 음향을 집중시키는 독특한 구조를 한 스피커이다. 이 구조의 특징 중 하나는 넓은 청취 점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유닛과 혼은 넓은 평판에 붙여, 후면 방사 음이 전방에 전달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한쪽 벽을 확장된 배플 면으로 모두 활용해 보다 개선된 음향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요즈음 박춘식 씨가 푹 빠져 있는 DIY 프로젝트는 웨스턴 우퍼에 일렉트로보이스 DH1A 혼 드라이버로 구성한 2웨이 스피커 제작이다. 혼이 특이한데, 옛날 기차에서 사용하던 경적용 쌍발 혼이라고 자랑한다. 전체 네트워크가 아직 구성되지 않아 혼 소리만 들어 보았는데 제법 상큼한 소리가 났다. 이 스피커를 울리는 것은 RCA 사에서 소규모 극장용으로 제작한 6L6 PP 파워 앰프이다. 작은 캐비닛에 내장된 앰프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우드 혼에 브라스 나팔을 달아 만든 혼 스피커 역시 시험 중이다. 스피커에 관한 한 철저한 DIY 파가 바로 박춘식 씨다.
에필로그
깊은 물속에서 귓전을 스쳐지나는 물결의 소리는 현실적이지 않다.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들어 자맥질하듯 들어간 얕은 강물에서도 서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만일 그 깊이가 35m가 넘는다면 과연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박춘식 씨가 상대했던 바다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깊은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공기 공급용 튜브에 의지해 20년을 살아왔다. 우리가 먹고 있는 미역과 다시마에는 그의 긴 호흡이 묻어 있다.
박춘식 씨의 삶의 현장을 그리면서, 나는 ‘빌 에반스와 짐 홀’의 앨범 <Undercurrent>의 겉면 사진을 바라본다. 물에 떠 있는 여인 위에는 LP에 새겨진 소리 골과도 같은 물결이 빛으로 강조된다. 시간에 따라 서서히 낮은 음역대로 바뀌는 파동은 여인을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다. 물밑 흐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자못 몽환적이지만 깊고 어두운 세계를 부유하는 여인과 그 위를 흐르는 물결만이 파동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 앨범의 표지는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림에서 두 손을 벌리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오필리아는 꽃을 꺾어 들고 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에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소리의 세계에는 매질이 필요하다. 그것이 공기든, 물이든. 오랫동안 박 씨의 고막을 짓눌렀을 물의 압력이 어떤 소리로 그에게 다가왔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음향과 소리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5월의 어느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