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를 통해 다시 찾은 위안과 평안,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
부산시 수영구 배창환 씨
부산 해운대 신도시를 지나 송정 해수욕장을 거쳐 일광 해변을 지나는 182번 버스는 부산의 동쪽을 이동하는 이들에게 무척 소중한 운송 수단이다. 편도 2시간 정도 걸리는 긴 노선으로, 정관 신도시 아파트에 이르러서야 끝난다. 이 버스가 지나는 곳곳에는 소금구이와 양념구이가 입맛을 돋우는 곰장어 집과 뼈째 썬 붕장어(아나고)를 야채와 함께 초고추장에 버무려 콩가루를 섞어 먹는 식당이 즐비하다. 속이 허할 때 한 잔의 소주와 같이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참복 국물은 또 어떠한가? 가히 맛집 탐방 버스라 불러도 괜찮을, 미식 명소들이 가득한 곳을 달린다. 이 노선의 맏형은 음악과 오디오, 미술품을 사랑하는 배창환 씨다. 그에게 어떤 계기로 오디오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인생 오십의 절망과 무작정 떠난 해외여행에서 만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음악과 오디오를 통해 다시 찾은 위안과 평안을 담담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직장인들은 종종 개인이 아닌 개체가 되어 소모품처럼 스러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다. 배씨 역시 나이 오십 즈음 인생과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일었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떠난 유럽 여러 나라 여행에서 그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깨우쳤다. 또한 자연 속에서 큰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평온한 일상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파리 센 강 보트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주말마다 벌이는 친구들과의 파티는 인간이란 서로 등을 기대고 사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했다. 그들의 보잘것없는 오디오 시스템에서 나오는 음악조차도 신비롭게 느낀 순간이었다.
방황의 시간을 뒤로 하고, 회사에 재취업하면서 그는 소리의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간 그의 공간을 차지했던 기기는 대부분 매킨토시 MC501과 B&W 802와 같은 현대 기기였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오디오적 쾌감을 느끼게 하는 소리에 한동안 푹 빠져 살았다. 그러는 중에도 푸근함과 편안함을 경험하고 싶다는 갈구가 가끔씩 솟아오르기도 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또 한 번의 도전을 하게 된다. 선택지는 진공관 앰프와 하틀리의 대형 스피커였다.
그가 현재와 같은 오디오 청음 환경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고향의 선배님 댁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평소 존경하던 분의 집을 방문하니 커다란 고급 스피커를 중심으로 다양한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전용 청취 공간에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배님의 오디오에 대한 가르침과 그날에 들었던 그 진한 소리의 향연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또 한 사람 그가 오디오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데 영향을 준 이는 오디오 숍을 운영하는 김사장이다. 오디오 지식이 전무하던 그에게 기기의 선택과 조합, 청음실 기기 배치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지도를 받았다.
메인 오디오 시스템
무늬목 인클로저의 그릴을 벗기면 하틀리의 검정색 배플과 흰색 유닛이 주는 흑백 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부드러운 질감의 우퍼는 벙벙거리지 않을까 선입견을 갖게 했지만 기우였다. 정미조의 ‘귀로’ CD가 재생되자 소곤소곤 들려주는 누님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30대에 불렀던 ‘개여울’의 음색과는 또 다른, 편안하고 고요한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해졌다. 오디오의 존재 자체를 잊게 하는 소리였다.
매킨토시의 진공관 파워와 프리앰프는 1990년대에 재발매된 2세대 제품이다. 초기 제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해 콘덴서의 용량이 감퇴되어 잔류 험이 나는 것들이 많고, 음색이 좋기로 유명한 범블비 커패시터 역시 누설 발생의 우려가 있다고 해 2세대 제품을 구매했다고 한다. 진공관을 구관으로 바꾸고 커플링을 교체하면 소리가 좀더 좋아진다고 하는데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날로그 LP를 재생하는 토렌스 TD-520은 SME 3012R의 12인치 톤암이 여유로운 소리를 낸다. 카트리지는 슈어의 V15 Type 3을 쓰고 있다. 조만간 MC 카트리지로 바꾸어 보유하고 있는 오토폰 T2000과 짝을 이뤄 줄 예정이다. 와디아 6 CD 플레이어는 디지털 기기답지 않은 자연스럽고도 아날로그 감성의 소리를 들려주어 자주 손이 간다.
배씨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CD 한 장만 고르라고 했더니 망설임 없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CD를 들어 올린다. 노년의 핵심 멤버들이 모여 6일 만에 녹음한 이 음반은, 은퇴한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르가 올드 카 옆을 담배 물고 지나가는 장면을 거친 칼라 색조로 담아낸 CD 커버 디자인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들의 음악이 아프리카에 닿아 있음을 강한 명암 대비로 표현한 이 커버 사진은, 꼼빠이 세군도의 ‘찬찬’ 만큼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텁텁하다. 세군도가 물고 있는 시가 맛이라고나 할까?
한동안 LP와 CD에 빠져 살던 그의 음악 생활에 변화가 찾아 왔다. 바로 유튜브 프리미엄의 등장이다. 블루투스로 태블릿과 DAC(디지털-아날로그 변환기)를 연결해 듣고 있다. 주로 영상과 음악을 TV와 오디오로 동시에 감상하는데 음원 걱정 없이 연속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LP나 CD의 음질을 따라가기에는 다소 부족함을 느끼기도 한다.
서브 오디오 시스템
두 번째는 블라우풍트의 LAB-405a 스피커를 중심으로 크리스털 오디오 칸타빌레 300B 싱글 앰프와 매킨토시 C8 프리앰프, 럭스만 T-530 디지털 튜너로 구성된 서브 시스템이다. 주로 FM 방송을 배경 음악 삼아 일할 때 사용한다. 튜너용으로 실내용 안테나를 연결했더니 감도가 좋아져 잡음이 섞이지 않은 방송을 들을 수 있다. 300B 싱글 앰프는 작고한 부산의 제작자 김창섭 씨가 제작한 것이다. 블라우풍트 스피커는 2개의 8인치 이소폰 우퍼, 2개의 타원형 중고음 트위터, 1개의 이소폰 돔 트위터를 갖춘 3웨이 스피커다. 주파수 대역이 무척 넓은데 30Hz에서 25kHz에 이른다. 4Ω 임피던스에 최대 입력은 75W이고 크로스오버 포인트는 2500Hz와 4000Hz에 맞춰져 있다. 이 스피커 네트워크에 사용된 전해 콘덴서만 메탈라이즈 필름과 같은 좋은 특성의 부품으로 바꾼다면 한 단계 향상된 성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프리앰프와 300B 앰프
C8 프리앰프는 MC30이나 MC60과 같은 동시대의 매킨토시 파워 앰프에서 히터 전압과 B 전압을 받도록 설계된 기기다. 매킨토시에서는 D-8이라는 전용 전원 공급기도 동시에 발매했는데 오래전 물건이라 구하기 어렵다.
매킨토시 C8은 LP 재생을 위한 모든 기능을 담고 있다. 레코드의 저음 그루브(Groove)의 폭을 줄여 재생 시간을 늘리고, 고음의 이득을 높여 재생 잡음을 줄이는 프리엠퍼시스와 디앰퍼시스 회로가 채택된 것이 1940년대다. C8 프리가 발매되던 1950년대에는 레코드의 재생 곡선으로 NAB(전미 방송 협회)와 AES(오디오 엔지니어링 학회), RIAA(전미 음반 산업 협회) 커브가 사용되던 시기였다. 매킨토시의 설계자는 당시 발표된 모든 재생 커브를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10개의 토글 스위치를 고안했다. C8 프리의 전면에 달려 있는 저음용 5개와 고음용 5개 토글 스위치는 레코드 제작자별로 등화곡선을 맞춰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능을 제공한다. 총 48가지 각기 다른 제작자의 레코드에 맞는 등화곡선을 선택할 수 있다.
재생 곡선 선택 스위치 이외에도 카트리지의 부하 임피던스에 맞춰 입력을 조절할 수 있고, 세라믹 카트리지까지 운용할 수 있는 등 다양한 기능 설계는 요즈음 하이엔드 제품이 추구하는 설계와도 일치한다. 또 하나의 기능은 라우드니스를 다섯 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 청감(Aural) 보상 기능이다. 실렉터 1단을 선택하면 1kHz에서 대략 5dB 감쇠가 일어난다. 5단까지 올리면 거의 25dB까지 떨어지니 실렉터 위치를 조절하면 최적의 청감을 얻을 수 있다. 이외에도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럼블 필터까지 모두 RC 소자로 만들어진 필터 회로를 보고 있노라면 맛있는 과자가 잔뜩 들어 있는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든다. 고음과 저음 조절은 부궤환 회로로 간략하게 구성되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이러한 앰프 설계를 손 계산으로 진행했을 터, 과연 초기 매킨토시 설계자들은 천재라고 하겠다.
오디오를 시작한 지 십여 년. 화려함보다는 청명하면서도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고 편안한 소리를 내는 기기를 찾아 헤맨 시간이었다. 최신의 하이엔드가 전해 주는 또렷한 스테레오 이미지보다는 풍성하면서도 모난 곳 없고 과장되지 않은 소리를 들려주는 오디오가 최고라고 배씨는 평가한다.
벚꽃 비가 내린 길가에 영산홍 꽃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분홍에서 진한 주황색까지 채도를 바꿔 가며 피어나는 꽃길을 오늘도 182번 버스와 함께 배씨는 달린다. 현대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건강한 사회 시스템이다. 예측 가능한 삶은 이 시스템이 살아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시간에 맞춰 우리나라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은 배씨와 같은 분들이 묵묵히 사회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인의 심성을 닮은 듯 무심하게 소리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의 오디오 시스템은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진화하고 있다. 또 한 번의 봄날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