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의 오디오 놀이터를 열다
한반도에서 새해 아침 해가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간절곶’에서 31번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아나고로 불리는 ‘붕장어회’ 맛이 특별한 ‘칠암’이 나온다. 이 도로는 그물코에 박힌 멸치를 떨어내는 어부들의 움직임이 일품인 ‘대변항’으로 이어진다. 이런 명소들에 둘러싸인 기장군에 청음실을 새로 열었다. 필자가 퇴직 후 찾은 인생 2막 놀이터다. 청음실 내부를 핸드폰으로 찍어 지인들에게 영상을 공유했더니 월간 오디오 편집실에서 오디오 마니아 섹션에 소개할 수 있는지를 물어 왔다. 부끄럽지만 이번 호에 필자의 오디오를 소개하게 된 배경이다.
1. 청음실 기기들
청음실의 전면에 설치된 랙에는 알텍 820A와 JBL K2 S5500 두 스피커를 울리기 위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 스피커들을 상시 구동하는 레퍼런스 시스템은 마이클슨 앤 오스틴의 TVA1과 매킨토시 MC1000 모노블록 파워 앰프가 쓰인다. 두 앰프에는 매킨토시의 C2200 진공관 프리앰프가 신호를 배분한다. 여기에 롯데 LP2000과 파이오니아 PL-61 턴테이블이 아날로그 소스 측에, 인켈 D103과 CD2000R CD 플레이어가 디지털 신호를 소박하게 담당한다. 카트리지는 오토폰의 MC10과 OMB20, 그리고 슈어의 M97x가 활약하고 있다. 빙빙 돌아가는 10인치 알루미늄 릴테이프가 움직이는 모양이 좋은 티악의 X1000R 릴 덱도 종종 작동되는데, 릴 녹음기로 증기 기관차 효과음을 들으면 실제 기차가 내게 돌진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CD 플레이어는 회로 일부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16비트 구형 기기들이지만 납득할 만한 소리를 내준다. 카트리지 승압 트랜스로는 오토폰의 T-20과 룬달 승압 트랜스를 내장한 국내산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입문기 정도의 기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애호가에게 적극적으로 공간을 개방하고 기기 작동을 허용하기 위해서이며, 파손 시 너무 속 쓰리지 않으려는 생각의 결과다.
2. 개발 중인 멀티앰핑 시스템
청음실 오른쪽에는 멀티앰핑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두툼한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스피커 인클로저에는 로더의 PM6A 풀레인지와 마샬의 10인치 우퍼가 내장되어 있다. 이연구소의 트랜스 프리 시작품에서 증폭된 소스 신호는 액티브 채널 디바이더에서 저역과 중·고역으로 나뉜다. 기준 주파수는 1kHz로 설정했다. 조만간 스피커의 우퍼를 12인치 이상으로 키우고 분할 저역 주파수를 500Hz로, 8kHz 이하의 대부분의 대역을 로더에게 담당하게 할 예정이다. 여기에 능률 좋은 트위터를 추가해 8kHz 이상을 재생시키면 본격적인 3웨이 스피커 시스템으로 바뀐다.
필자의 경우 세 종류의 진공관 기기를 만들어 쓰고 있다. 저역은 6C33C 진공관이 채용된 OTL(출력 트랜스가 없는) 싱글 파워 앰프가 사용된다. 약 37W의 출력을 내고 있는데 교향곡 총주 시 그릉거리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좀더 실감나게 듣기 위해 출력을 100W급으로 올릴 예정이다. 대부분 음역대를 담당하는 로더 풀레인지 구동을 위해 300B 싱글 앰프가 연결되어 있다. 트위터 추가를 대비한 EL34 푸시풀 모노블록 앰프도 준비하고 있다.
3. 개인용 청음 공간
연말이고 보니 찾아오는 지인들도 점점 뜸해진다. 가급적 해 떨어지기 전에 청음실에서 20분쯤 걸리는 아파트로 향한다. 집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오디오 기기에 전원을 넣는 것이다. 진공관 앰프에 전기를 먹이고 10분쯤 기다리면 매킨토시 MC240 파워의 6L6 진공관이 충분히 달아오른다. 토렌스 TD 127 턴테이블의 시작 버튼을 누른다. 턴테이블에는 클래식 대편성이나 재즈 LP가 종종 올려진다. MC240와 짝을 이루는 프리앰프는, 같은 회사의 C11. 카트리지는 고에츠 로즈우드나 SPU 골드 레퍼런스를 번갈아 가며 쓴다. 승압 트랜스는 오토폰 T3000.
LP를 서너 장쯤 듣고 나면 몸이 나른해 지면서 LP를 올리는 일이 점점 귀찮아진다. 이때는 심오디오의 DAC에 연결된 블루투스 수신기에 핸드폰을 연결한다. 핸드폰의 KBS 콩(KONG) 앱을 켜고 최은규가 진행하는 <FM 실황음악>을 듣는다. 앱으로 재생하는 실황 연주가 들을 만하다. 고백하건대 가끔은 소리가 너무 좋아 감동할 때도 있다. 고가의 아날로그 기기로 음악을 듣는 것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스피커는 탄노이 RHR을 쓰는데 클래식 음원을 부드럽게 재생해 스피커 존재 자체를 잊게 한다.
카트리지와 톤암 시험을 위해 슈어 사에서 발매한 음반을 이용한다. ‘ERA Ⅳ An Audio Obstacle Course(오디오 장애물 코스)’란 재미있는 제목이 붙은 음반인데, 플루트, 하프 등의 악기 소리를 6구간에 걸쳐 키워가면서 카트리지가 어느 정도 크기의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 대부분의 카트리지는 1구간 정도만 재생 가능하다고 한다. 톤암 공진 시험을 위한 트랙도 있어 매우 요긴한 LP다.
4. 오래된 기기에 왜 매혹되는가?
첫째, 높은 신뢰도 때문이다. 이 사진은 수리 중인 매킨토시 MC240 파워 앰프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기판에 핀을 박고 여기에 모든 수동 소자의 리드를 리본 모양으로 감은 것이 보인다. 이러한 결선 방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기나 염분 등의 외적 요인으로 인해 땜납의 특성이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정기적으로 교체해 주어야 하는 전해 콘덴서가 수십 년 동안 제 용량을 유지하는 것도 신뢰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회로적으로도 충실하고 디지털 소스를 연결해도 들을 만한 소리를 낸다. 물론 요즈음 나오는 초고가 하이엔드 기기에서 나오는 하늘거리면서 맑은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리 광대역이랄 것도 없으나 낼 소리는 제대로 내는 기기가 바로 빈티지 앰프들이다. 특히 대편성 교향곡 재생에는 그저 그만이다.
둘째, 다양한 부가 기능이 충실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시판되는 하이엔드 프리앰프는 저음과 고음을 조절하는 기능이 생략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소스에 따라서는 이 기능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특히 LP 재생을 위주로 하는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저역의 ‘턴오버’와 고역의 ‘롤오프’ 보상 곡선이 LP마다 달라, 저역이 다소 부족하거나 고역이 너무 강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톤 조절 기능이 있다면 매우 요긴할 것이다. 애호가들이 매킨토시나 마란츠 구형 프리앰프를 많이 찾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부가 기능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두 회사의 구형 프리앰프의 경우, 고역과 저역 조정을 위해 저항과 콘덴서를 이용한다. 소자들을 실렉터에 일일이 납땜해 만드는 CR 보상 회로는 요즘 중·저가 앰프에 사용하는 부궤환 보상 회로에 비해 직진성이 좋고 신호 응답이 빠른 특징이 있다. 물론 생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잡음과 왜율 특성도 다소 나빠진다.
셋째, 충성파 애호가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70년 된 스피커가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역시 60년을 넘어가는 골동품과 같은 프리앰프가 수백만 원에 거래된다. 물건만 좋다면 어느 곳이라도 달려올 예비 구매자가 대기하는 이상한 시장이 형성되는 곳이 빈티지 오디오 시장이다. 왜 그럴까? 빈티지 기기는 기본적인 성능이 납득할 만하면서 앤티크적 디자인 감성이 존재한다. 물론 들려야 할 소리 역시 충실히 재생한다. 여기에 구매할 때와 팔 때의 감가상각이 그리 크지 않은 실용적 관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를 빈티지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한다.
5. 맺는 글
오디오란 음악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다. 연주회장의 가장 좋은 객석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오디오를 통해 재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꿈이다. 인간의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의 아름다움과 바이올린의 가냘픈 진동음에 감동하지 않는 인류는 없다. 필자가 오디오 제작을 인생 2막의 업(業)으로 시작하면서 아음(雅音)이란 상호를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엔트리든, 하이엔드든, 빈티지든, 최신 제품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리. 아름다운 음악만 들을 수 있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