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노이 블랙에 대한 폄하와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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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노이 블랙에 대한 폄하와 찬사
  • 이창근
  • 승인 2012.08.01 00:00
  • 2012년 8월호 (481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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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0여 년 전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스스로를 원망하며 자책하게 되는데, 이유인즉 바로 탄노이 블랙과의 첫 만남에 얽힌 무지했던 과거사 때문이다. 한창 황학동 순례란 재미에 빠져 온갖 물건들을 구경삼아 돌아다니던 중 보자기에 싸인 고물 유닛 한 조를 앞에 두고 담배만을 연신 피워대던 노인 한 분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사는 이와 파는 이의 수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번성하던 시기라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특별하게 진열된 것도 아닌 그 노인의 알맹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한 번 보자고 채근해보니 돌아오는 반응이란 게 애들은 가라에 가까운 차가운 푸대접뿐이었다. 굴욕 속에서도 연거푸 졸라대어 가까스로 구경해 본 그 알맹이의 정체는 바로 탄노이 블랙! 그러나 막 오디오에 눈을 뜨던 그 시절 최고의 목표는 GRF 메모리였고, 초라함으로 위장한 황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음은 물론 당시 제시했던 가격이 횡재 수준이었다는 걸 알게된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여러 가지 탐문 끝에 뒤늦은 구매를 시도해보았지만, 그 이후 다시는 그 노인을 보지 못했고, 세월이 갈수록 후회는 쌓여갔지만 한 번 왔던 기회는 지금껏 찾아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급전이 필요했던 오디오 고수가 업자들에게 넘겨지는 게 싫어 제대로 된 주인을 찾고자 했던 이벤트 아닌 이벤트가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 있는데, 교과서에도 실렸던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란 수필 속 얘기처럼 필자에게는 그렇게 아쉬움 속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벼룩시장에서 품안에 들어왔다 가버린 그날의 블랙 모델은 2012년 현재 주거공간과 바꿔야 할 만큼 몸값이나 이름값 모두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것도 모자라 전문 숍에서조차 구경하기 힘든 너무도 먼 당신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1947년 탄노이가 최초의 동축형 유닛로 개발한 LSU/HF15/L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탄노이 블랙이다. 수집가들은 유독 생산 원년의 것에 눈독을 들이는데, 이후 모델들에 비해 두개의 자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면이 다르고, 네트워크 형태나 프레임 재질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15인치와 12인치가 있고, 실버가 등장했던 후기형 중에 블랙·실버란 혼합형이 존재하여 이 또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버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은색 햄머톤의 프레임에 검정 에나멜 칠을 한 자석 커버로 조합된 투톤 바디를 이루는 것도 있고(후기형으로 갈수록 모두 실버 컬러로 통일됨),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형태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블랙 콘지가 쓰였나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특유의 얇은 재질 때문에 온전한 것을 만나볼 수 있다면 행운에 포함된다. 알텍 803a와 비교될 정도의 얇은 콘지에서 통통거리며,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량한 사운드 때문에 경탄과 지지 세력이 존재하는 바 진정 음색만을 놓고 본다면 지존의 대열에 합류시켜야 함은 당연지사,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낮은 내입력과 얇은 콘지의 특성상 대편성을 대음량으로 재생하기엔 여간 무리스러운 것이 아니다. 금전에 전혀 구애됨이 없고, 블랙 모델을 서너조 이상 보유하고 있다면, 마음대로 울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만은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조건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는 조금 다르지만 블랙은 풀레인지의 개념으로 음색 위주로 탐닉하면서 협주곡 정도 편성 수준에서 만족한다면 최고의 스피커임엔 틀림없다. 여기서 그 이상의 스케일을 원한다면 실버 이후 모델이 유리하며, 가격대에 비해 들을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약점이다. 부족한 아래 대역을 보충하기 위해 오토그라프 통에 넣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 정도 보완되는 면도 있으나 복잡한 미로 구조인 오토그라프의 음도를 타고 나오는 블랙의 소리는 왜곡되는 면이 더 커서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라고 본다. 오토그라프가 실버와 짝을 이뤄 그 이후부터 생산된 인클로저임을 고려해본다면 납득이 가리라 생각한다. 블랙은 오히려 구조가 단순한 베이스 리플렉스 형태나 변형된 평판에 장착했을 때 특유의 청명함이 잘 살아나고, 깔끔한 배음이 첨가되어 더 좋은 결과를 여럿 보았기에 그러하다. 필자가 처음 탄노이 블랙을 다루었을 때, 블랙이 시냇물이라면 이후 모델은 수돗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지인 댁에서 탄노이 블랙 15인치 초기형을 요크 통에 넣어 들어보았는데, 절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자신하게 되었다. 똑같은 냉수라 할지라도 냉장고에서 시원해진 물과 겨울철 바깥에서 차가워진 주전자 물은 마셨을 때 몸에서 전해지는 서늘함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탄노이 블랙에는 감미료로 낼 수 없는 달콤함 또한 존재하는데, 그 또한 흡사 고로쇠 수액의 감칠맛이 아닐 수 없다. 자꾸 물맛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은 더 이상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색투명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질감 위에 과하지 않은 간접 음을 이끌어내는 잔향감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거주 공간과 바꿔볼만하다는 객기를 발동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낮은 대역에서의 아쉬움과 내구성에 대한 우려, 그리고 너무도 과해진 가격만큼은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특유의 음색과 유려한 질감만으로도 가치 충분한 물건임엔 틀림없다. 최고로 추앙받는 탄노이 블랙에 너무도 많은 흠집을 낸 건 아닌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쓴 글임을 양해바라며 혹시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탄노이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필자의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지금 동원 가능한 금액대에서 고를 수 있는 탄노이가 최고입니다!' 

탄노이 블랙 15인치 첫 모델 


탄노이 블랙 12인치 함석 버전 


탄노이 블랙 12인치 주물 버전
481 표지이미지
월간 오디오 (2012년 8월호 - 4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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