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는 욕심이며 버림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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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욕심이며 버림은 깨달음이다.
  • 김기인
  • 승인 2017.07.01 00:00
  • 2017년 7월호 (540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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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날로그를 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기술적 이해를 추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소프트웨어인 SP, EP, LP를 모으는 여정이었다. 그러다 보면 주변 소프트웨어인 오리지널 카세트테이프나 릴 테이프에까지 손이 미치게 되었고, 또한 그에 따른 하드웨어로 수많은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 카세트 및 릴 데크에도 덩달아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보니 리스닝 룸과 서재, 심지어 거실과 창고까지 필자의 아날로그 용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그것은 어느 날부터 필자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판의 수량이 적을 때는 찾기도 쉽고 정말 소유하고 사랑하며 음악을 찾아 듣던 습관에서 이젠 판들을 정리하고 보수하다가 하루가 가기도 하고, LP 특유의 냄새와 먼지가 필자에게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LP 판의 보관과 이동이 부담되어서 이사도 못하고, 판이 공간을 점령해 나가자 나의 자유 공간은 점점 포위되어 좁아져 나갔다. 물론 아내의 눈총도 더욱 따가워져 내 가정적 입지는 땅바닥에 추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2만여 장이나 되는 판들을 둘러보다가 깨달음이 왔다. 듣지도 않는 까만색 원형 비닐 때문에 왜 이 넓은 집을 좁게 쓰면서 너의 삶까지 고달픈가 하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양쪽 귀 아래 뇌를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 없애자. 필요한 것만, 아니 그 이상으로 없애고 미니멀리즘 오디오 생활을 하자. 까짓것 CD로 듣고 PC 파이로 듣자. 그래 다 버리자…. 아니 팔자…. 그리고 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무겁고 냄새나고 먼지가 많아 정리마저도 고달픈 중노동이었다.

꼭 들어야 하고 내 인생 추억의 배경으로 박힌 판들만 제외하고, 한 장씩 한 장씩 정리되어 나왔다. 아예 오픈도 안 된 판도 많았다. 그러나 국악, 가요, 그리고 중학교 시절 추억의 멜로디가 담긴 낡은 판들, 그 판들을 보자 듣고 싶어져 정리하다 말고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애니멀스 초반… 정말 눈물이 나도록 좋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버려…. 다시 팔려고 내놓은 판 중에서 몇 장을 골라 보관용 판이 있는 곳으로 옮긴다.
이 짓을 수십 번 반복해 드디어 2만여 장 중에 1만6천 장을 골라 팔기로 하고, 나머지 4천장을 보관 장소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정리도 또한 등골이 빠지는 노동이었다. 판은 정말 무겁고 분류하기가 힘든 대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마음은 너무나 홀가분했다. 더군다나 업자를 불러서 판매한 판 값은 그 판을 구할 때 가격의 다섯 배 이상 올라 있어 아무리 업자 구입가라 할지라도 오피스텔 한 채 값이나 되는 돈이 생겼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판에 대고 절을 했는데 마치 그 판들이 나에게는 훌륭한 스승 같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문학적으로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만, 그 반열에 LP 판도 올려놓고 싶어졌다. 음악으로 예술적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깨달음도 주었고, 더불어 재산도 늘려 주었기 때문이다.
소유는 욕심이며 버림은 깨달음이다. 소유는 깨달음 없이 할 수 있지만 집념을 버리든 소유한 물건을 버리든 무엇이나 버리는 것은 깨달음 없이 행해지는 바가 없다. 버릴 때는 모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나의 스승 LP판…. 사람은 정말 버리고 살아야 돼, 버리는 것의 진정한 쾌락을 알게 해 준 것이 바로 판이기에 판은 나의 스승의 자리에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번 정리에서 얻은 소득은 깨달음과 재산뿐 아니라 잊어버렸던 옛날 추억과 예상치 않은 대상들도 튀어나왔는데, 이것은 정리가 부수되었기 때문에 덤으로 얻은 경사였다. 무엇인고 하니…. 보이지 않은 구석진 LP 랙 사이에서 도널드 페이건(Donald Fagen)의 <The Nightfly> 앨범과 함께 아직 미사용 프로용 구형 암 R.M.C.(Radio Music Corp.)와 교환용 MC 카트리지 헤드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품목이 같은 자리에 숨겨져 있던 이유는 도날드 페이건 앨범 사진에 이 암이 장착된 턴테이블과 함께 페이건이 담배를 피우면서 RCA 마이크 앞에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R.M.C. 암은 12인치 프로 버전 롱암으로 묵직하면서도 디자인적 매력이 있는 중침압용 암이다. 전면 나사를 돌리면 LP용, SP용 두 가지 MC 헤드 카트리지가 다이렉트로 교환되는 방송국용 프로 암이다.
페이건 앨범에 나오는 턴테이블처럼 꾸미고 싶어 하나씩 하나씩 부속을 수집하다 언젠가 그 꿈을 잊어 버리고 수십 년이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모양이다. 그 바람 뒷자락에 이제 장년 나이가 된 청년 수집가의 꿈이 세월의 폭풍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다. 이 한 장의 판과 이 하나의 암이 내 삶에 또 하나 배경이 되어 버림의 깨달음 속에 커다란 목단 꽃처럼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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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7년 7월호 - 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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