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퍼(Nipper)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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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퍼(Nipper)를 찾아서
  • 김기인
  • 승인 2016.02.01 00:00
  • 2016년 2월호 (523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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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입장에서 가장 눈길을 끌고 시선이 가는 상표는 소위 ‘His Master's Voice’로 불리는 그라모폰 유성기와 니퍼 독 마크다. 죽은 주인의 목소리가 유성기에서 울려 나오자 주인인줄 알고 소리 나는 혼 앞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H.M.V. 상표는 한 컷의 그림이지만 그 안에 애잔한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어 어느 때에 보아도 매력 있다. 니퍼는 1884년에 태어나 1895년 가을에 죽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배경으로 프란시스 바로우(Francis Barraud)에 의해 1898년 가을부터 1899년 1월까지 유화로 그려졌다. 오리지널 그림은 크기가 36″×28″로 제작되었고, 1913-1924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24장의 카피가 바로우에 의해 다시 그려졌는데, 사이즈는 27″×21″로 약간 축소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은 영국에 있는 그라모폰 컴퍼니의 회의실에 있고, 나머지 카피들은 미국의 빅터 사와 몬트리올의 베를리너 컴퍼니 등 주로 음반 회사와 유성기 회사에 산재되어 있지만, 모든 카피의 소재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니퍼 상표의 사용 권한은 기본적으로 영국 EMI(Electric & Musical Industries Ltd.)에 있고, 미국에서는 Victor Talking Machine Company에 있다가 1929년 RCA 빅터 컴퍼니로 개칭되고 그 권한이 RCA로 넘어갔는데, 1985년 RCA와 GE(General Electric Company)가 합병되면서 그 이후부터는 GE로 권한이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JVC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 JVC는 2차 대전 전부터 미국 빅터 사와 기술 협력 및 제조 협력을 해 자동적으로 미국 권한 니퍼 사용권을 계승하게 된 것 같다.
초기 바로우의 니퍼 그림은 사실 홀대받던 그림이었다. 그러나 영국 EMI가 상표로 사용하자 급속도로 세계 시장에 풀려 나간 역사적인 그림이 되어 버렸다. H.M.V.의 그림에 나오는 유성기는 HMV의 전신인 그라모폰 No 4 모델로, 후면 수평으로 스프링 핸들이 달린 초기 버전이다. 그 이전의 스프링 노출형의 No 1, No 2, No 3가 있지만 바로우 시절에는 No 4 모델이 유행했었던 것 같다. 바로우가 HMV 사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서 팔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니퍼 스토리를 그림으로 구성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HMV 상표가 되어 버린 것 같다. HMV는 결국 세계 최고급 유성기 메이커로 성장했고, 니퍼 마크를 사용하는 EMI 레코드 사 역시 세계 최고의 음반 회사로 발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림엔 골드의 HMV 음반은 순수하게 니퍼 상표를 사용하는 EMI 초반이며, EMI의 재반, 3반 등 후기까지도 니퍼는 스탬프 독 또는 똥개(?) 등의 명칭으로 사용된다. 잘 아는 RCA Living Stereo 초반의 쉐이드 독이 정통파 니퍼이다. 재반인 화이트 독에서도 니퍼의 모습은 유지되고 있지만 3반 등으로 넘어가면서 니퍼는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RCA 마크로 대신하게 된다. 일본 JVC에서는 초기 진공관 라디오와 전축 등에서 소극적으로 니퍼 마크를 사용했고, 음반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으며, 역시 후반기로 넘어서며 점차 소멸된다. HMV 마크를 가장 최후까지 고수한 것은 역시 영국 EMI 사로 1980년대 음반에서까지도 볼 수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시대감각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점차 사용 빈도가 낮아진다.
필자가 소유한 HMV 유성기의 157, 163, 202 등의 커버를 잦히면 안쪽에 상표인지 그림인지 모를 품위 있는 HMV 마크가 나타난다. 작지만 그 품격은 대단해 어느 상표와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발하고 있다.
HMV 마크는 영국 EMI 사가 채택한 이후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상품에 적용되어 제품화된다. 도자기로 만든 실물 크기의 영국제 니퍼가 나오고, 이 실물 크기의 니퍼에도 양이 안 차 대형 니퍼, 소형 니퍼 등 수많은 모형과 액세서리가 제조되어 수집가나 관광객에게 판매되었다. 이 도자기 니퍼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얼굴 표정이다. 얼굴 표정이 슬프고 사납지 않은 것이 선호되며, 초기 오리지널 영국 도자기 니퍼는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이 니퍼와 소형 혼 유성기를 같이 놓으면 그야말로 품격이 그만인 전시품이 된다.
HMV 니들 박스의 윗면에도 아름다운 니퍼 그림이 있다. 레드 톤, 브라운 톤, 블루 톤, 그린 톤 등의 니퍼들이 스틸 유성기 바늘의 라우드 혼(음량 음색 톤)을 대변하며 판매되어 니들 박스 수집가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 외에 넥타이, 컵, 시계, 펜, 셔츠 등에 다양하게 그림이 사용되었고, 아직까지도 그 소품 수집가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도 파블로 카잘스의 1936년 HMV 녹음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을 HMV 163 유성기에 걸고 들어 본다. 실제 카잘스가 첼로를 연주하는 듯한 실감나는 음색이 마음을 적신다. 유성기 음반에서 울려 퍼지는 성악이나 현은 가히 실성에 가까워 어느 오디오 시스템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움직임 속에 무엇인가 니퍼의 혼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HMV 마크 속에서 130여 년을 살아 온 최장수 개가 바로 니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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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6년 2월호 - 5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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