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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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 기행
  • 김기인
  • 승인 2016.01.01 00:00
  • 2016년 1월호 (522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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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이 왔다. 가는 세월만 생각하면 하염없이 서운하기만 하지만, 오는 세월을 생각하면 그저 서운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희망도 떠오른다. 세월이 가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지난 세월에서 이룩해야 할 것들을 다 놓쳐 버리고 허전한 현시점에 놓였다는 것이 이 서운함의 원천일 것이다. 사람은 해야 할 것을 끝마치면 나머지 세월은 덤으로 얻어지며, 무엇을 해도 아쉽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힘이 생긴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가 다 다르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영원해지고 싶은 그 단계에 이르는 아름다운 사랑이다. 그 사랑을 논하게 되면 神과 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그 사랑은 오지 않는다. 그 사랑은 시작해야 길이 열리는데, 사랑은 스스로 길을 열어 길을 잃지 않으며, 멀리 바라보기만 하는 미약한 열정으로는 이룩된 역사가 없는 거대한 열정의 로망이다. 사랑은 미침이다. 미쳐서 미치겠는 감정이 아니라 미쳐서 행복한 열정이다. 사랑의 미침에 빠지면 더 이상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미쳐서 사는 감정 그것이 마니아들의 열정이다.

아날로그 마니아의 세계에도 사랑의 감정과 동일한 열정이 있다. 아날로그가 아니면 안 되는 그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열정 속에서, 스스로 이것이어야만 한다는 독선에 가까운 결론으로 프라이드를 갖는 바로 그것이 이 험난하고 복잡한 세계를 이겨 나가게 하는 천군만마의 원병이 될지는 몰랐다. 이제 아날로그를 찬양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러서 어떨 때는 이것도 신앙의 일종인가 하는 자위의 미소를 짓게 하는데, 그래도 그 모든 실체들이 내 조그만 집의 한방에 애인처럼 들어앉아 나를 틀림없이 매일 반겨 준다는 것에 도달하면 지루한 하루 고된 일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새로운 세계를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날로그는 오래된 정인(情人) 같다. 그에 비해 디지털은 2주만 통화가 안 되면 휙 다른 남자에게 날아가 버리는 경박한 현대 여성 같다. 아날로그는 따뜻하며 언제나 나를 반기며 맞아 주고, 내가 항상 그리워하는 기품 있고 따뜻한 가슴의 정인이다. 아날로그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가 더해지고, 심지어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필자에 속한 아날로그 여인들은 모두 할머니에 해당한다. 우선 소프트웨어인 LP가 그런데, 가장 나이가 든 정인은 일본 빅터 사에서 1930년대에 녹음한 정정열제 춘향전이고, 그 다음으로는 영국 HMV가 1936년에 녹음한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SP 판이다. 그 뒤를 이어 도미, 남인수를 비롯한 가요 SP이며, 이를 지나 흰머리 가시고 희끗한 머리채의 정인들이 요한나 마르치, 제닌 안드레이드, 마이클 라빈, 나탄 밀슈타인, 레오니드 코간, 블루노트 재즈, 신쾌동, 손시향, 김정미 등의 모노 LP이다. 흰머리가 사라지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검은 머리의 완숙한 미소와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다음 여인들은 데카의 와이드밴드, HMV 크림엔 골드, 컬럼비아의 블루엔 실버, 유니버설의 가요 LP, 지구, 대도, 서라벌, 오아시스 스테레오 LP 음반에 산재되어 있다. 너무 많은(?) 정인들에 휩싸여 있으면 정신 차리기가 힘들 터인데도, 이 정인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는커녕 더욱 각자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만들고, 영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한다.

이에 비하면 LP 정인들의 진가를 돋보이게 하는 하드웨어 정인들은 수시로 바뀌는 편이다. 하드웨어 정인들의 눈길로 필자는 무한한 바람둥이 그 자체다. 그러나 그 마저도 이제는 필자가 나이가 들어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 강하다. 언젠가 머물렀던 옛 하드웨어 정인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도 부지기수이고, 이미 그곳에 도달해 행보를 멈춘 경우도 있다. 그곳은 바로 탄노이 실버 유닛이 장착된 오리지널 오토그라프다. 물론 순수 영국 혈통은 아니고, 미국 피가 살짝 섞인 미제 사각 인클로저에 15인치 실버 유닛이 장착된 중후한 귀부인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밭일을 시켜도 허리 아프다는 불평 한 마디 없는 근육질의 영국 아줌마와 덴마크 쟁기가 조합된 가라드 301 + RMG 309 정인도 나가라 하고 싶지 않아졌다. 우아하고도 섬세한 귀족 규슈 마란츠 7C와 단아한 시골 소학교 교사 같은 브룩 12A 파워 앰프도 아직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고, 저 섬마을 수더분한 어부 딸 같은 피셔 500B 리시버 앰프는 항상 문간방에서 모든 것을 준비한 상태로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

너무나 많은 정인들, 그러나 하나 같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쌓고 따뜻함으로 대화한다. 때로는 그녀들과 나누는 사랑이 내 실제 사랑을 뒷받침해 주는 그 메신저가 아닐까!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단번에 사랑에 이를 사람은 귀하디 귀하다. 아날로그 정인들로부터 이 세상을 지탱하고 살아나가고 영원으로 향하고야 마는 실제 사랑의 힘을 지원받는 것은 아닐까. 아날로그는 필자에게 이해 겨울 마지막 사랑의 메신저로 울려 퍼지며 용기를 북돋우고 있다. 이제 너의 사랑 연습을 내가 마쳐 주었어. 세상으로 나가 사랑해. 그게 누구든 사람을 한 번 사랑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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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프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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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6년 1월호 - 5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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