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쿤(Bakoon) DAC와 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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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쿤(Bakoon) DAC와 앰프
  • 김갑수(시인, 문화 평론가)
  • 승인 2015.07.01 00:00
  • 2015년 7월호 (5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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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사람, 건전 무쌍한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다. 실제로는 잘 만나지지 않는 이념형의, 머릿속 생각이 만들어 내는 부류다. 대부분 온갖 욕망이 또아리 틀고 있으나 부도덕할 자신이 없고 불건전할 용기가 없어서 숨죽이며 살아가려니 여긴다. 나 자신도 이런 자신 무(無), 용기 무(無) 측에 속한다. 착하고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 교과서를 일평생 혐오해 왔지만 그리 멀리 벗어나 보지 못했다. 그저 포르노적 상상에 부합하는 아주 약간의 해프닝쯤이 젊은 시절에 지나갔다고나 할까.
도덕성과 건전함을 견지시켜 준 내력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가장 많은 사유는 ‘먹고 사느라’ 자동으로 올바르게 된 것일 테고 또 혹자는 사회적 성취를 위해 몸을 사렸을 터이다. 지난날 나도 먹고살아감이 그리 원활했던 경우는 아닌데,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아무렇게나 막 먹고 막 살아가겠다는 신념(?)이 워낙 확고했다. 먹고살기 위해 도덕적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대신 내 인생에는 다른 종목의 압도적인 부도덕이 기본사양처럼 깔려 있었다. 음악을 아주 많이 사랑한 일이다. 그렇다. 음악은 내 삶에서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부도덕이었다.

까까머리 중·고등생 시절에 음악은 ‘공부’에 맞서는 부도덕이었다. 라디오로 팝송을 들으며, 음악 감상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배우며, 언제나 죄의식에 시달렸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하는 질책이 늘 바늘처럼 따끔거렸다. 정말로 음악 때문인지, 일찍 찾아온 문학병 때문인지 과연 학과 성적은 남부럽지 않게 바닥을 기었다. 그럭저럭 웬만한 대학을 나왔으면서 학창 시절 얼마나 놀았는지 무용담을 펼치는 인간이 많은데 누구라도 한 번 겨루어 봤으면 싶다. 나는 제 정신이 아니게 놀아버린 청소년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 자신이 있다. 60명 한 학급에서 한 50등쯤 해본 사람 있으면 손드시라. 중간고사 전날 밤에도 꼬박 새우며 음악을 듣는 시간은 참으로 끔찍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괴로웠고 자책감에 한없이 시달렸다. 베토벤은 그리 위안이 되지 못했다. 단지 멈출 수가 없었을 뿐.

종편 예능이나 시사프로에 단골로 얼굴을 비추게 되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선생은 좌파군요’ 혹은 ‘어쩌다 종북좌빨이 되셨어요?’하는 반응을 달고 산다. 긴 설명이 필요한데 짧게 말할 도리가 없어 피식 웃고 만다. 보수 정권의 퇴행성에 비판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내게 좌파나 종북주의자 정체성이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저 남들이 붙여주는 딱지다. 좌파, 그런 질문보다는 ‘왜 죽자고 음악을 들으세요?’ 하는 질문을 받고 싶은데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는다. 궁금해 하지 않는데 앞장서 말하는 것은 멋쩍은 일이다. 차라리 ‘이 좋은걸 왜 가까이 하지 않으세요?’ 하고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 들고는 한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날마다 밤마다 술자리와 텔레비전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주 시건방진 표정으로 말하고 싶다. ‘왜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문제는 시건방 하나로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역시 부도덕과 죄책감 문제다. 내 대학시절 운동권 근처에 있었던 사람에게 음악은 일종의 금기였다. 자신의 출신 계급을 버리고 민중의 바다로 뛰어들라는 명제 앞에서 음악 탐닉은 지탄받아 마땅한, 부도덕한 사치에 해당됐다. 그러나 중고등 시절과 밤은 유사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죄스럽고 짐스러워 해야 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지금은 상세 설명이 불가능한 터라 그냥 ‘운동권 출신’을 인정해 버리지만 그전에는 달랐다. 내게는 운동권 친구가 많았을 뿐 감히 그런 갸륵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70~80년대 학생운동이란 ‘혁명’을 도모한다는 뜻인데, 전혀 개조되지 못한 정신적 부르주아가 고개를 세울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야학 교사를 하면서 실제로는 거기 여자 동료와 연애를 하고 밤마다 음악을 들었던 거라고 밝히고는 했다. 쇼스타코비치나 바르톡을 사랑했는데 내 죄의식을 감싸주지는 못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죄책감은 심화일로였다. 가장이 되었는데 가족을 향해야 할 수입이 음반과 오디오 값으로 죄다 새버린다. ‘아, 부도덕하다. 물론 멈출 수가 없어서 지금도 여전히 부도덕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왜 이래야 하나’하고 한탄한다.
이쯤되면 자책도 습관이다. 세 살 자책 여든까지 간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온당한 일이라고 권장되었다면 오히려 멀리했을 것 같다. 가령 운명의 장난으로 음악 대학에 진학하게 돼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악을 가까이 해야 할 상황이었다면 분명 딴짓을 했을 거다. 기질로 봐서 도박이나 난봉질, 심하면 마약쟁이가 됐을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도덕한 나쁜 짓이 음악듣기여서 나는 지금까지 음악쟁이로 살아간다. 고급 오디오에 어마어마한 음반을 소유했으면서 사회개혁 운운하니 캐비어 좌파, 위선적 진보라고 하는 비난이 달갑다. 내 유전자는 부도덕을 매개로 하게끔 프로그래밍된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을 의향도 없고 험한 곳에 가서 감동적인 사회봉사를 할 여건도 만들지 못하면서 남북 간 화해 국면, 사회 복지 확대, 대기업 규제 따위의 주장을 철회할 의사는 전혀 없다. 캐비어 좌파의 부도덕한 처신인데 그 아득한 생각의 공백지대를 날마다 음악으로 채워 넣는다. 내 음악 듣기는 스스로를 향한 가해에 가깝다.
부도덕과는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어쨌든 또다시 가책을 느껴야할 항목이 올해 또 생겨났다. 이 항목은 위선 내지는 변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수개월에 걸친 이러저러한 내력이 있지만 줄여 말하자면 뜬금없이 ‘PC 파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음악 파일로 음악을 듣는 일말이다.

지난 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는 제목의 음악 칼럼집을 내면서 마치 아날로그의 수호자인 양 했다. 숱한 인터뷰에서도 같은 말을 했고 진심으로 그런 주장을 내면화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날로그의 우월성을 열심히 전파한 까닭은 실제로 LP로 듣는 사운드가 가장 좋았고, 또 하나 디지털의 맹위 앞에서 그에 맞서는 독립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멋스럽기 위해 사는 것이다. 스스로 멋지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어둑신한 조명 아래 턴테이블을 돌리고 LP 음반과 스태빌라이저와 진공관 앰프를 차례차례 가동시키는 행위는 분명 멋진 일이다. 그 짓을 잠시라도 멈추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컴퓨터를 클릭해서 내 하츠필드 스피커나 젠센 임페리얼 혹은 탄노이 레드 등을 우렁차게 가동시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그 사운드가 장난이 아니다. 현재 나는 20테라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구비해 주로 초고음질 FLAC 파일을 구입해 온갖 장르의 음반을 하나하나 새로 듣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대략 10테라 가까운 음원을 구했는데 이 정도면 몇 천 장 가까운 음반에 해당될 것이다. 이 음원조차 죽을 때까지 다 들을지 모를 분량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20테라, 아니 그 이상의 음원을 긁어모을 심산이다. 이건 기질이다. 미친 듯이 광분해야 하고, 제정신이 아닐 만큼 뭐가 많아야 직성이 풀린다. 세 본 적이 하도 오래돼서 가늠이 안 되지만 내게는 대략 3만여 장의 LP와 1만여 장의 CD가 있다. 늘 변동이 있지만 대략 15조쯤의 빈티지 스피커와 한 20여조쯤의 진공관 앰프들이 있고 다섯 대의 턴테이블과 열 개의 톤암이 구동된다. 전부가 아날로그를 최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세팅이다. 그런데 PC 파이를 새로 시작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최상의 PC 파이 사운드를 구현할 것인가. 그쪽 동네 선수들에게는 좀 유치한 소리겠지만 첫 단계는 당연히 디지털 음원의 신호를 아날로그로 변환시켜 주는 DAC의 성능이다. 여기에 또 하나, 주로 1930~50년대에 제작된 진공관 앰프들만 갖고 있는 터라 현대식 앰프가 별도로 필요하다 생각됐다. 오디오쟁이들은 잘 알 것이다. 무얼 하나 결정 내리는데 얼마나 많은 학습과 만남과 시청과 전전반측의 망설임이 따르는지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나는 일제 바쿤(Bakoon) 제품들에 도달해 있는 상태다. 가격대로는 수천만원 호가하는 최상품이 아니지만, 그 퀄러티는 최고가품들과 견주어 별로 뒤지지 않는다는 판단이 든다.
PC 파이 전용 컴퓨터에 플레이어로는 푸바2000을 깔았다. 본격 PC 파이를 한다면 필수가 아닐까 싶게 다양한 기능이 있고 음질도 안정적이다. 컴퓨터 속 음원 파일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DAC인데, 바쿤 DAC-9730이라는 모델이고, 앰프는 모노모노로 구성된 바쿤의 SCA-7511 MK3이다. 스피커는 새로 구입하지 않고 기존의 다양한 빈티지들을 번갈아 사용 중인데, 아직 무엇이 최적인지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탄노이보다 JBL 계열에 더 손이 간다는 정도다.
일종의 바쿤(Bakoon)론을 쓸까 생각하고 시작한 글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새버린 이야기로 마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아직 충분히 바쿤의 가능성을 숙지하지 못한 상태다. 또한 그리 많은 DAC나 앰프들과 비교 시청을 하지 못한 탓도 있다. 그래도 비교적 여러 경로로 체험을 해보고 망설임을 거듭한 끝에 바쿤에 도달한 까닭은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최상의 상태로 듣던 아날로그 사운드와 비교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의 바쿤 관계자들은 설계자 나가이 아키라 씨가 ‘천재’라고 극찬해 마지않는다. 나가이 씨가 진짜 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억 소리 나는 가격대와 견주어 크게 저렴함에도 사운드적으로 별로 뒤처지게 들리지 않는 점이 참 신기하다. 무엇보다 나가이 씨의 음악적 지향이 진공관 사운드에 있다는 점은 분명히 감지가 된다. 그의 앰프는 비교적 뭉툭하면서 낮게 깔리는 특성을 보이고 오래 들어도 부담감이 없다. 아마 예민한 자극을 원하는 유저라면 너무 무난하다고도 여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처럼 전통적인 오디오파일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 문득 변화를 갈망하고 그러다 혹시 PC 파이에 도전해 보고자 한다면 망설임 없이 선택해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앞으로 기회를 만들어 2천만원대 DAC와 겨루어 뒤지지 않았다는 바쿤 신화를 직접 시험해 볼 작정이다. 나 자신이 또 하나의 바쿤 신도가 될지 또 새로운 행로를 찾아나갈지 앞날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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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5년 7월호 - 5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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