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보 스페셜리스트, 가라드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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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 스페셜리스트, 가라드 301
  • 이창근
  • 승인 2012.02.01 00:00
  • 2012년 2월호 (475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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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빈티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티보의 음반에 손이 자주 가게 된다. 현란한 기교로 무장한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귀에 착 달라붙는 오밀조밀함도 좋지만 분주한 명절 시즌에 편안한 휴식을 얻고자 한다면 티보의 나긋함이 안성맞춤이다. 자크 티보(1880.9.27~1953.9.1). 프랑스 보르도 출생인 그는 1953년 9월 1일 세 번째 일본 연주 여행 도중 알프스 상공에서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그의 분신 1709년산 스트디바리우스와 함께 우리 곁을 떠난 비운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티보의 사고 몇 해 전에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천재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를 똑같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잃어야만 했었는데, 그가 바로 지네트 느뵈이다. 20세기 들어 가장 주목받았던 음악 신동에서 끔찍한 사고의 사망자 명단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불과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로 1949년 10월 27일 파리발 미국행 에어 프랑스기가 대서양 중부 아조레스 군도의 로돈타 산봉우리에 추락 후 탑승객 48명 전원이 사망한 대참사였다. 비행기 안에는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으로 유명한 세계 미들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도 타고 있었다고 한다. 느뵈를 아꼈던 티보는 자신도 비행기 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며, 이는 공교롭게도 현실이 되어버렸고, 예술분야의 대 높은 자존심에도 불구 음악계에서만큼은 변방이었던 프랑스의 국보급 두 연주자들은 이렇게 사라져 갔다. 그나마 이들이 남긴 녹음을 지금도 들을 수가 있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티보의 연주는 자신의 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프랑스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우아하게 마무리되는 절제미가 내재되어 있어 차 한 잔과 어우러지듯 녹아든다. 그의 고향 보르도산 적주의 진한 향취를 음미할 수 있는 그윽한 연주는 모노반 특유의 흑백톤에 스며들며 음악에 심취하게끔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폭탄주에 얻어 맞은 몽롱함이 아니라 질 좋은 사케나 와인에서만 전해지는 아래에서부터 밀려오는 뜨거움으로 분위기에 먼저 젖어들게 하는 품위가 상존한다. 옛날 녹음이라 스스로 첨가하는 추억에 의지한 회고적 감성이라 평할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필자의 연배가 모노 녹음에 익숙한 세대도 아니고 유독 티보의 연주에서만 감지되는 아련함 같은 것이 있기에 그러하다. 티보를 대표하는 명 바이올린 소품집 중 비탈리의 샤콘느를 가만히 음미해본다. 이 곡은 당대 최고란 평가를 받고 있는 하이페츠의 연주가 가장 유명하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으로 알려진 비가 중의 비가를 스타일이 전혀 다른 하이페츠와 티보의 연주로 번갈아가며 들어도 보니 역시 좋은 대비감을 보여준다. 장중한 오르간 반주로 시작되는 하이페츠의 연주는 시종일관 긴장감과 비통함을 유지하며, 테크니션으로서의 기교가 요소요소 가미되어 이 갈리는 슬픔의 고통을 뚜렷하게 표현해준다. 어찌 보면 고통의 정도가 심해서 슬픔 속에 복수를 다짐하는 기운마저 느껴지는데, 다분히 남성적인 힘의 정서를 엿볼 수가 있다. 그에 반해 티보의 연주는 대체로 차분하고 침착한 가운데 슬픈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분위기로 슬픔의 공통 분모인 고통을 표출하기보다는 안으로 묻어두는 여성적 포용력이 먼저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그를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하이페츠의 연주가 포효의 선율이라면, 티보의 연주는 습윤의 선율이라 해두고 싶다. 필자가 20대였다면 당연 하이페츠의 음반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티보의 연주에 훨씬 더 친밀감이 생긴다. 그만큼 도전하고 응전하기엔 세상사에 지치고 소심해진 탓도 있으리라. 그리고 귀가 감당할 수 있는 청력도 더 이상 공격적인 사운드에 맥을 못 추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가라드 301, 그리고 선택의 늪 과거의 거장들, 그것도 소편성 바이올린 연주곡이라면 아직은 LP로 들어야 한다. 구 녹음은 아무리 좋은 CD 플레이어라도 어색함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AD 플레이어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구 녹음에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이라면 가라드 301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들 곁엔 린 LP12를 위시한 현대의 벨트식 신예기들이 즐비하고, 과거의 토렌스, Rek O Kut, 엠파이어, 게이트 등이 건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소위 내뱉고 토해내는 기계는 많지만 이것을 흡수하여 머금었다가 조용히 뿌려내는 성향의 기계는 가라드밖에 없다. 현악,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 소나타는 후자의 감성을 가진 AD 플레이어가 아니면 안 된다. 이는 반대로 대편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선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약점도 많고 거품까지 심해버린 가격마저 생각한다면 조용히 사장되어야 할 기종이지만, 앞서 언급한 티보 같은 연주자들이나 소편성 현악을 소화해내는 면에서 가라드 301을 능가하는 AD 플레이어를 아직 보지 못했다. 아이들러 방식으로 대변되는 가라드 301이 조금씩 잊혔던 건 아이들러 방식의 약점 중 하나인 모터의 진동이 플래터에 전달되어 음질의 열화를 초래했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아이들러 최대 강점인 균일한 회전 속도에 의하여 얻어지는 소리의 밀도감과 뚜렷한 음상은 벨트·다이렉트 방식 등 후속 기종에서 맛볼 수 없는 부분이자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옛날 녹음에서 빛을 발하는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가라드 301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그리고 베이스를 취향대로 제작할 수 있는 취미성까지 가미된다. 바디 컬러에 따라 햄머톤 그레이, 아이보리, 그리고 베어링 방식 따라 그리스 타입과 오일 타입 등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보통 햄머톤 그레이에 그리스 타입, 그리고 오토폰 오리지널 롱암에 SPU면 레퍼런스급으로 간주된다. 가장 초기 버전에 해당하는 구성으로 비싼 값을 지불해야하는 최고급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소리가 좋다, 나쁘다의 우열보다는 여력이 된다면 올라가볼 수 있는 최고를 써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가장 오래된 비 버전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다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혹시 여러 사정상 써보지 못한다면 아쉬움과 함께 동경으로 남아버리기 때문이다. 윤활유에 따라 점성 값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 소리 또한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초기 버전으로 구성했을 경우 아주 미세하게나마 구수한 중역대의 순도가 돋보이기는 했으나, 둔중한 면도 더 심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가라드 301의 경우 시기별 구이나 오리지널 구형 롱암에 대한 집착보다 포노 앰프, 카트리지, 승압트랜스 등과의 조화가 더욱 중요하며 매트의 변화 등 작은 액세서리에서 얻어지는 잔재미적 효과도 간과할 수 없으니 명성보다는 진정 나만의 구성을 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베이스의 제작에 있어 석재, 목재, 아크릴 등 소재도 다양하고 적층으로 할 것인지 납을 비롯한 충진재를 투입할 것인지 등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하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내 눈을 즐겁게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의 가장 중간에서 일정 부분 이상을 차지하는 턴테이블인지라 주변의 권유에 이끌려 내 취향에 맞는 디자인에서 벗어나면 분명 방출의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바디 색상의 선택에 있어서도 물론이다. 햄머톤이 고가이고 더 좋다는 주변 말만 믿고 구입했다가 동호인의 아이보리를 접하게 되면 그렇게 탐날 수가 없다. 그리고 굳이 비싼 오리지널 암을 고집하기보다는 넉넉하게 베이스를 짜서 각기 다른 톤암을 두 개 정도 사용하는 게 여러 용도에 맞을 것이다. 제대로 정비된 무결점의 가라드 301은 분명 매력적인 턴테이블이다. 국내에는 가라드 전문점이 몇 곳 있는데,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결점을 보완하거나 교체한 뒤 비용 면에서 유리한 복각 암을 사용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아주 민감한 성격이 아니라면 '떵~'하고 돌아가는 기계적 소음도 가라드의 일부로 인정하고, 조용히 음악에만 몰두해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완벽을 추구하는 턴테이블이 아니고 일정 부분에 특화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기에 그러하다. 사뿐하고 나른한, 그러면서도 심지가 살아있는 찰기! 그리고 한 번쯤 쓰다듬게 되는 유선형의 바디지 눈과 귀의 까다로운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거의 유일한 구식 뺑뺑이임에 틀림없다. 꼭 비닐 디스크를 돌려야만 한다면, 그리고 티보를 사랑하고 지네트 느뵈, 요한나 마르치, 지오콘다 데 비토, 에리카 모리니 같은 여류 연주가들의 섬세한 감성을 스트레스 없이 듣고자 한다면 가라드 301은 오늘도 우아하게 회전하며 그냥 그렇게 자리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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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2년 2월호 - 4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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